미디어는 성폭력을 세상에 알려 경각심을 일깨우겠다고 하지만 스스로 ‘가해자’가 될 때가 적지 않다. 특히 본질에서 벗어난 보도나 성폭력 피해자에게 편견을 덧씌우는 보도로 2차 피해를 불러올 때도 많다. 검찰 내 성폭력에 대한 최근 보도에서도 이런 문제가 되풀이됐다.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의 여성 검사 성추행 사건을 다루면서 한 일간지는 “女(여)검사 ‘29페이지 미투’에 검찰 쑥대밭 됐다”라는 제목을 달았다. 피해자가 조직에 해를 미친 사람인 양 표현한 전형적인 뒤집어씌우기다.
[카드뉴스] 나는 그 날을 잊기 위해 노력했다(http://h2.khan.co.kr/201801311919001)
기억나지 않는다, 피해자와 합의했다, 술에 취해 실수했다…. 미디어는 그동안 성폭력을 다루며 가해자의 변명을 실어왔다. 사건과 관련 없는 피해자 개인 신상을 언급하는 일은 부지기수였다. ‘섬마을 여교사 성폭행’ ‘밀양 여중생 성폭행’처럼 피해자를 들먹이며 사건을 명명했다.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정슬아 사무국장은 “가해자가 얼마나 어렵게 살아왔는지 굳이 전하면서 면죄부를 주고, 피해 여성의 평판이나 옷차림을 들며 ‘피해자 유발론’을 이끌어낸 것이 미디어들”이라고 지적한다.
성폭력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이미지들, 여성 피해자를 ‘○○녀’라 이름붙이는 것도 2차 가해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의 김보화 책임연구원은 “수사기관이 범죄를 입증하지 못해 가해자가 무혐의 처분을 받았을 때 곧바로 피해자를 꽃뱀이나 ‘무고녀’로 몰아가면서 2차 피해를 불러왔다”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미디어에 나타나는 성폭력 피해 여성의 또 다른 전형적인 형태는 ‘고개를 숙이고 주저 앉아 우는 모습’이다. ‘미투’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여성들이 사회를 바꿔나가려는 주체로 다뤄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미디어는 여성의 지위나 성취에 상관없이 외모나 패션에 주목한다. 여성 스포츠인에겐 ‘흑진주’, ‘요정’ 같은 표현이 붙는다. 여성 연예인의 몸매를 부각한 기사들은 여성의 몸을 감상과 품평 대상으로 만들고 획일된 미의 기준을 강요한다. 방송 시청자들은 중년 남성과 20~30대 여성이 진행하는 뉴스 포맷에 익숙하다. 기상캐스터 대다수는 젊은 여성이다. 예능 프로그램 속 여성은 주로 남성과 짝 맞추는 보조 역할을 한다. 드라마에서는 ‘벽치기 키스’같은 데이트 폭력이 로맨스의 탈을 쓴다.
한국기자협회는 2014년 여성가족부, 여성아동폭력피해중앙지원단과 함께 ‘성폭력 사건보도 가이드라인’을 만들었고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지난해 ‘양성평등 방송 프로그램 제작 안내서’를 배포했다. 콘텐츠 주제를 고를 때부터 특정 성의 시각이나 관점을 배제해선 안 되며, 불평등한 현실을 소재로 삼을 때 문제의 본질을 외면하거나 단순화하지 않아야 한다고 명시했다. 성 역할 고정관념을 깨고 양성의 다양한 삶을 보여줘야 하며 성폭력·가정폭력을 정당화하거나 선정적으로 다뤄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문제는 ‘실천’이다. 남재일 경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안태근 검사 한 명을 비판하는 데에서 멈추지 말고, 구조에서 오는 폭력이나 일상에 만연한 폭력에 대해 미디어가 먼저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현재 여성문화이론연구소 대표는 “선정적 콘텐츠를 제공하는 공급자와 이를 보고 싶어하는 수용자의 관계가 맞물려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미디어 종사자들은 젠더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하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오리엔테이션조차 받지 않은 상태”라며 “종사자 교육과 더불어 콘텐츠 이용자들이 분별력을 높일 수 있는 미디어 교육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난달 31일 서 검사가 언론에 밝힌 입장문은 미디어가 해야 할 일을 분명히 말해 준다. “이 사건의 본질은 내가 어떤 추행을 당했는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문제였으며, 어떻게 바꾸어 나갈 것인가에 언론과 시민들께서 집요하게 관심을 가져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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