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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에서 '미투'로](8)그때는 숨죽였지만…“이제는 당당하게 함께 맞설게요”

폭력적 구조와 그 안의 ‘괴물’에게서 상처받은 개개인은 어떻게 치유될 수 있을까. 연극연출가 이윤택씨(66) 등의 상습적 성폭력 사태가 던지는 질문이다. 해답을 찾는 초입에 선 연극인들의 방향성은 하나로 모아지고 있다. 자신까지 포함한 연극계의 어둠을 낱낱이 드러내고, 피해자들이 ‘집단적 주체’ 안에 함께 설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다. 이를 위해 하나둘씩 손바닥을 펴고 펜을 들어 ‘위드유(#WithYou·당신과 함께하겠다)’를 적어 넣는다.

연극계 ‘위드유’ 운동이 확산하고 있다. 지난 14일 이씨의 상습 성폭력에 대한 첫 폭로가 나온 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위드유’ 해시태그(#)를 달거나 이 문구를 적은 손 사진을 올리는 글이 수시로 게시된다. 피해자들을 지지하고 연대한다는 의미다. 권력구조의 약자로서 피해를 입은 당사자인 동시에, 변화의 주체로서 힘을 그러모으기 위한 활동이다.

연극계 성폭력 등 위계폭력 피해자들에게 지지와 연대를 표현한 연극인들이 자신의 손바닥에 적어 놓은 ‘위드유’(#Withyou, 당신과 함께하겠다)로 동참의 뜻을 밝히고 있다. 이기쁨·이해성·이주희씨 제공


‘위드유’는 대개 피해 사실을 폭로하는 ‘미투(#MeToo·나도 당했다)’를 동반한다. 이에 더해 연극인들의 메시지엔 폐단을 먼저 드러내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론 방관자가 됐다는 자기고백이 뒤섞이고 있다. 과거를 성찰하면서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 “비겁하게 피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글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폭력적 위계구조 안에서 움츠러들었던 피해자들이 오히려 앞장서 참회록을 써내려간다. 제왕적 권력을 쥔 이들이 외면하는 사이, 반성의 책임도 피해자에게 넘겨진 연극계의 슬픈 자화상이다.

급속도로 번지는 ‘위드유’ 운동은 그간의 ‘침묵의 카르텔’을 깨고 ‘발화의 연대’를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현 사태를 한 번 불어닥치고 지나가는 회오리가 아닌, 계속된 자정 작용의 시작점에 두는 것이다.

기사화에 동의한 몇몇 연극인들의 ‘위드유’ 메시지에도 이 같은 지향점이 보인다. 극단 ‘고래’의 이해성 대표는 사태 초기인 지난 15일 올린 글에 “#MeToo #WithYou #It’s not your fault(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라는 해시태그를 달았다. 그는 스스로를 가해자 입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전제한 뒤 “권력관계에 의한, 위계에 의한, 욕망에 의한 폭력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우리의 과제”라며 “연극계 전체가 이 문제를 담론화하자. 함께 얘기하고 토론하고 논쟁해서 과거를 반성하고 성찰하자”고 적었다.

연희단거리패 전직 단원인 최샘이씨는 “연희단거리패가 합당하고 바른 책임을 질 수 있도록 직언할 것”이라며 “성폭력 문제에서 나뿐 아니라 타인의 일에도 적극 대항할 것이다. 섣부른 간섭이 아닌 실질적인 힘이 될 수 있도록 예민하고 냉철하게, 치열하고 피곤하게 고민할 것”이라고 다짐하는 글을 올렸다.

‘창작집단 LAS’의 이기쁨 대표는 “어처구니없는 광경들을 많이 목격한 내가, 하지만 그런 끔찍한 경험들에서 조금은 비켜나 있기 때문에 더 명확하게 ‘하지 마세요’라고 말하지 못한 내가, 피해버리고 마는 내가 결국은 방관자인 것이니 마음이 너무 괴롭다”면서 “이런 마음이라도 같이(하겠다)”라고 했다. 극단 ‘수수파보리’의 정안나 대표도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다. 아프다”며 “연대하고 릴레이에 동참한다”고 했다.

‘미투’와 ‘위드유’의 범위는 성폭력뿐 아니라 위계폭력 전체로 넓어졌다. 21일엔 연출가의 욕설과 폭력, 경제적 착취 구조 등에 대한 추가 폭로가 나왔다. ‘1인 권력’ 문화를 해체하고 연극 생태계를 바꿔야 한다는 쪽으로 논의가 확장되는 흐름이다. 집단적 대응도 본격화하고 있다. 서울예대 총학생회는 원로 연극연출가인 교수의 제자 강제추행 의혹이 불거지자 “오태석 교수의 교수직 해임과 서울예대에서의 퇴출, 피해자들에 대한 공개 사과를 총장과 대학본부에 강력히 요청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블랙리스트 타파와 공공성 확립을 위한 연극인회의’(블랙타파)는 이날부터 매주 극단 ‘고래’ 연습실에서 피해자들에 대한 법률 조력 방법과 추후 대응 방식을 두고 논의에 들어간다.


“고은 시 교과서 제외” 목소리…교육부 “수록 현황 파악 중”

유정인·남지원 기자 jeongin@kyunghyang.com

문화계 성폭력 폭로가 이어지면서 가해자로 지목된 문화계 인사들에 대한 정부 지원이나 작품의 교과서 게재 적절성 여부 등이 검토되고 있다.

교육부가 ‘문단 내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고은 시인(사진)의 시가 실린 교과서 현황을 파악하고 있다.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인물의 작품을 교과서에서 소개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지적에 따른 조치다. 향후 고 시인의 시가 교과서에서 빠질 가능성도 작지 않다.

교육부는 21일 중·고교 검정 국어교과서에 고 시인의 작품이 수록됐는지 파악하고 있다며 “교과서 내용과 관련해 사회적 논란이 있는 경우 현황을 알아둘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유승민 바른미래당 공동대표가 “고 시인의 시를 국정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말하는 등 교과서에 소개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현재 초등학교 국어교과서에는 고 시인의 작품이 없다. 중·고교 국어교과서는 검정도서라 교육부가 아닌 발행사와 저작자가 수정·보완 권한을 갖고 있다. 따라서 고 시인의 시를 제외할 것인지는 출판사와 저자들이 판단하게 된다. 교육부는 “작품 삭제까지 포함해 수정을 논의할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향후 발행사나 저작자가 수정·보완을 요청할 경우 교과서 상시 수정·보완 시스템을 통해 관련 내용을 검토할 예정”이라며 수정 가능성을 열어놨다.

이날 문화예술위원회도 연극연출가 오태석씨의 성폭력 논란과 관련해 3월로 예정된 오씨 작품의 공연 여부를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 

앞서 문예위는 창작 신작 지원사업인 ‘공연예술 창작산실’ 지원작 중 하나로 오태석 연출의 신작 <모래시계>를 선정했다. <모래시계>는 3월15일부터 서울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될 예정이다. 
문예위 관계자는 “공연 여부를 내부 논의하는 중으로 되도록 빨리 결정해 발표할 것”이라면서 “오태석 연출과 연락이 닿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