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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침묵'에서 '미투'로](9)피해자에 집중된 시선 거두고, 폭력의 구조 해체를

연극계 ‘미투(#MeToo)’ 운동의 불길은 격렬하면서도 차갑다. 연극계 위계 폭력을 낱낱이 고발하는 불길은 전방위로 뜨겁게 타오른다. 2차 가해 방지와 근본적 해결책을 강조한다는 점에선 냉철하고 신중하다. 현 사태를 두고 피해자들의 상처를 자극적으로 전시하는 게 아니라, 위계 폭력 구조를 깨뜨리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냉철한 인식에 깔려 있다. 언론에 선정 보도 자제를 요청하고, 내부의 성찰적 대안을 찾는 움직임도 확산 중이다.

23일은 연극 연출가 이윤택씨(66)의 상습 성폭력에 대한 첫 폭로가 나온 지 10일째다. 폭로 대상은 연출가 오태석씨를 비롯한 다른 연극인들로 넓혀졌다. 이 과정에서 이름을 밝히지 않은 피해자들 신상이나, 피해사실을 자극적으로 적시한 글들이 언론 등을 통해 전파되면서 우려의 목소리도 함께 커졌다.

“침묵의 시대는 끝났다” 한국여성민우회 주최로 23일 서울 신촌 유플렉스 앞 광장에서 열린 ‘달라진 우리는 당신의 세계를 부술 것이다 - 강간문화의 시대는 끝났다’ 공개 발언대회에 참석한 여성들이 성폭력에 반대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전날 출범한 ‘성폭력 반대 연극인 행동(연극인행동)’은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방지를 강조했다. 이들은 성명서에서 “언론 또는 인터넷에서 이뤄지는 2차 피해에 적극적으로 행동하겠다”며 “2차 가해 집단과는 협력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씨의 성폭력을 처음 고발한 극단 ‘미인’의 김수희 대표도 지난 20일 언론을 향해 “피해자 찾기를 당장 멈춰달라”고 했다.

이 같은 움직임은 피해자에게 집중되는 시선이 피해자의 고통을 더하고, 본질을 흐린다는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미투 운동에서 진상조사와 법적 처벌, 위계폭력과 젠더폭력 구조 해체 같은 문제가 뒤로 밀려난다는 것이다. 여성학자 정희진씨는 성폭력 피해자를 다룬 글에서 “‘우리’는 상처받았음을 강조하는 대신에 저들의 폭력을 폭로해야 한다. ‘우리’의 상처가 크고 작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략) 문제는 ‘그들’이 사는 메커니즘 자체이고 그들의 잘못이지 ‘우리의 약함’이 아니다(<혼자서 본 영화>)”고 한 바 있다.

‘연극인행동’은 ‘건강한 연극 생태계’를 만드는 근본 대책 마련에 나설 계획이다. 자정 움직임도 속속 나온다. 공연제작사 ‘연극열전’은 최근 입장문을 내고 “모든 작품의 계약서에는 성폭력 예방 관련 조항을 기재하도록 준비 중”이라고 했다. 극단 ‘노을’도 이씨 등과의 영구단절을 선언하고 극단 내 윤리강령을 제정할 뜻을 밝혔다.

공연계의 또 다른 주역인 관객들도 나선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자발적으로 모인 이들이 오는 25일 오후 3시부터 ‘연극뮤지컬관객#WITH_YOU집회’를 연다. 장소는 공연계의 상징적 공간인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부근이다. 피해자들을 지지하고 성범죄 가해자의 처벌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낼 예정이다. 집회를 알리는 포스터와 로고 등을 관객들 힘으로 제작하고, 집회 구호도 모집하고 있다. 23일 공개된 첫번째 집회 구호는 이렇다. “공연/ 올린다던/ 예술가는/ 어디 가고/ 추악한/ 성범죄자/ 무대 위에/ 서 있는가.”


“개인 성향 억압…집단주의 내면화, 강한 위계 속 이윤택은 아버지 역할”

유정인·김서영 기자 jeongin@kyunghyang.com

ㆍ권정은씨가 6개월간 참여 관찰한 ‘연희단’의 실체

<“개인을 넘어서는 그 자리” : 연희단거리패의 의례로서의 연극과 자아의 재구성>은 권정은씨의 서울대 인류학과 석사 논문이다. 

연극을 하는 이들이 자신과 타인·집단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지, 연극이 어떤 자아를 형성하도록 하는지, 연극 활동에서 강조되는 사람됨의 모습은 어떠한지 고찰한다. 

권씨는 연구를 위해 2015년 3월부터 8월까지 6개월간 연희단거리패(이하 연희단)에 들어가 참여 관찰했다. 논문은 최근 드러난 이윤택씨의 상습 성폭력과 제왕적 지배의 배경, 정신적·물리적 폭력을 당하고도 드러낼 수 없던 피해자의 고통·고립을 현 단계에서 다시 들여다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권씨는 “연희단은 개인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집단과 공동체를 매우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연희단의 고참 단원들은 개인주의화된 현 시대를 비판하며 단원들의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훈계한다”고 했다.

논문을 보면 이씨는 집단주의를 강조한 것으로 나온다. “(예술감독 이윤택은) 현시대가 개인화되고 파편화되었으며, 이런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연희단은 세상으로부터의 독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권씨는 예술감독인 이씨가 암묵적으로 아버지 역할에 비유되었다고 했다. 

또 “연희단은 단지 예술을 하려고 세운 극단이 아니라 다 같이 먹고살면서 연극을 하기 위해 만든 극단”이라며 같이 사는 것을 강조했다고 권씨는 적었다. 연희단 단원들은 경남 밀양연극촌 등에서 합숙하며 연극과 생활을 함께하는 방식으로 일해왔다. 

사생활이나 개인 휴식을 금기시했다. 개인 자유를 누리려는 언행은 연희단이라는 집단 전체의 조화와 통일을 방해하는 요소로 간주됐다. 병원을 다녀와도 개인적인 시간과 공간을 누리고 온 것으로 여겨졌다. 쉬는 시간이 없다는 것을 괴로워한 어느 단원은 “이곳이 ‘완전히 공산주의’ 같다며 고참 단원들의 ‘독재’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권씨가 목격한 연희단은 위계질서가 강했다. “선배가 후배를 자주 집합시키고 훈계하거나 혼을 내는 것도 연희단의 위계질서를 볼 수 있는 한 단면이다.” “신참 단원들은 신참 단원 환영식이나 예술감독의 생일잔치 등과 같이 친교를 목적으로 하는 연희단 자체 행사에서 단체로 장기자랑을 할 것을 요구받는다.”

단원들은 연희단이 정이 많고 의리 있는 단체, 즉 관계중심적 특징을 부각시켰다. 단체생활의 내면화를 충분히 경험한 단원들은 이를 바탕으로 ‘떼씬’(군중신) 같은 앙상블을 중시하는 연희단 특유의 공연을 수행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다. 

하지만 사생활과 자유에 대한 억압, 위계질서, 예술감독과 고참의 권위에 따른 어려움은 체념 또는 퇴단으로 이어졌다. 권씨의 조사기간 동안에도 10명 이상이 연희단에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