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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와 삶

‘권력형 성폭행’ 징역 5년→10년으로 최고형 높인다…‘방조’도 처벌

미투 운동이 확산하면서 사회 전 영역에 만연한 성폭력이 연일 드러나는 가운데, 정부가 권력형 성범죄 형량을 최고 징역 5년에서 10년으로 늘리는 법 개정을 추진한다. 또 성폭력 피해자들이 가해자에게 역고소를 당하는 일이 많아 신고율이 떨어지고 2차 피해가 빈발한다는 지적에 따라, 성폭력의 경우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죄’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도록 조치하기로 했다.

정현백 여성가족부장관이 8일 정부서울청사에서 문화예술계 및 직장내 성희롱, 성폭력 근절 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정지윤기자


직장 내 성폭력은 익명 신고만 들어와도 고용노동부가 행정지도에 들어간다. 사업주가 성희롱을 했거나, 직원의 성희롱을 징계하지 않고 방치할 경우에도 과태료만이 아니라 징역이나 벌금형에 처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을 검토한다. 8일부터 고용노동부 홈페이지에는 직장 내 성희롱 익명신고시스템을 만들어 익명 신고를 받는다. 성폭력 피해자가 미성년자였을 경우, 성인이 될 때까지 민사상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시효를 정지시키는 것도 추진한다.

여성가족부는 범정부 성희롱·성폭력근절추진협의회(협의회)가 8일 오전 첫 회의를 열어 이런 내용을 담은 ‘직장 및 문화예술계 성희롱·성폭력 근절 대책’을 확정했다고 밝혔다. 협의회는 위원장인 정현백 여가부 장관을 비롯해 국무조정실·기획재정부·교육부·법무부·고용노동부 등 12개 부처 차관과 민간위원으로 구성됐다.

정부가 세계여성의날인 8일 발표한 성희롱·성폭력 대책은 ‘권력형 성희롱’ 등 직장·조직 내 상하관계를 악용한 범죄에 대해 처벌을 강화하고 피해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제도 개선, ‘미투’ 고발이 잇따른 문화예술계에 대한 조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성폭력 대응을 강화하기 위해 형법 등 법률 10개를 손보거나 새로 만든다는 것이다. 성범죄 형량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여왔던 법무부 등 정부 여러 부처들이 폭발적인 여론에 밀려 상당히 진전된 대응방안을 내놓은 셈이다.

'권력형 성폭행' 징역 5년→10년으로 최고형 높인다…'방조'도 처벌

하지만 너무 제한적이라는 지적을 받아온 성폭력의 법적 기준은 손대지 않았고, 학교 내 성폭력에 대해서는 대책이 포함돼있지 않다. 정부는 향후 여러 부처들 간 협의를 통해 대응책을 계속 검토·실행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정 장관은 이날 회의 후 서울 정부종합청사에서 브리핑을 열고 “정부 대책이 오늘 발표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약속드린다”며 “계속 보완해 특히 여성들이 체감할 수 있는 대책을 만들어 가겠다”고 말했다. 법무부는 “권력형 성범죄에 대한 처벌이 미약하다는 비판이 제기돼왔고 타당성이 있다고 판단해 형량을 높이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 ‘권력형 성범죄’ 최고 징역 10년

안희정 전 충남지사나 대학 강단에 서온 배우 조민기씨, 이윤택 연출가 등의 사건에서 보이듯 미투 운동을 통해 폭로돼 사회적 충격을 안긴 사건들은 대부분 권력관계를 이용한 성폭력이었다. 앞으로 이런 권력형 성범죄의 처벌은 무거워질 것으로 보인다.

업무상 위계나 위력, 즉 육체적 힘만이 아니라 사회·경제·정치적 지위나 권세를 이용해 성폭행을 저질렀을 때에는 법정 최고형이 현행 징역5년, 벌금 1500만원에서 징역10년, 벌금5000만원으로 올라간다. 권력관계에서 일어난 성폭력 범죄를 조직적으로 방조했을 때에는 직접 가해자가 아니더라도 수사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방조죄를 적용해 처벌받게 한다. 추행에 대한 법정 최고형은 현행 징역2년, 벌금500만원에서 징역5년, 벌금3000만원으로 높인다.

성폭력을 당한 이들이 피해사실을 공개한 뒤 가해자로부터 도리어 고소를 당했을 때,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죄’로 처벌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알리면 더 괴로워진다”는 생각에 피해자들이 공개를 꺼리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이기도 했다. 성폭력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이런 경우 형법 310조에 따른 ‘위법성 조각사유’를 적극 적용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사실을 밝혔음에도 명예훼손으로 처벌받지 않도록 하겠다는 뜻이다. 별도 법규를 두거나 기존 법규를 고치는 대신 법률 적용에서 유연성을 발휘하기로 한 셈이다. 박균택 법무부 검찰국장은 브리핑에서 “명예훼손죄가 없어지면 미투 운동에 참여한 피해자들을 겨냥하는 가해행위까지 처벌하지 못하게 될 수 있어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결론을 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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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에 따른 형량이 늘어나면서 공소시효도 길어진다. ‘업무상 위계·위력에 의한 간음죄’는 현행 7년에서 10년으로, 업무상 위계·위력에 의한 추행죄는 현행 5년에서 7년으로 늘어난다. 미성년자일 때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는 성인이 된 후에라도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도록 민사상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를 성인이 될 때까지 유예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 성폭력 방치한 사업주도 징역형 가능

권력형 성폭력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곳은 상하관계로 조직이 짜여 있는 ‘직장’이다. 고용노동부는 이날부터 홈페이지에서 직장 내 성폭력 신고를 받는다. 피해자 신상정보는 밝히지 않되 가해자와 소속회사는 명시해야 노동부가 조사할 수 있다. 익명 신고만 들어와도 해당 사업장에 대한 행정지도를 하며 예방 차원의 지도감독에 들어간다. 이성기 노동부 차관은 “(익명 신고를 바탕으로 한 현장조사는) 아직 전례가 없어 여러 경우가 예상된다”며 “조사 과정에서 피해자가 드러나면 또다른 피해가 일어날 수 있어, 현장조사에서 유연하고 탄력적으로 대응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부는 또 남녀고용평등 업무를 전담하는 근로감독관 47명을 배치할 계획이다.

사업주가 성희롱을 하거나 가해자를 징계하지 않는 등 방치했을 때에는 벌금 또는 징역형을 받도록 법 개정을 검토한다. 지금은 사업주가 직접 성희롱을 하면 1000만원 이하, 성희롱 행위자를 징계조치하지 않으면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만 물게 하고 있다. 성폭력 피해자가 도리어 사직을 종용받거나 부당하게 인사조치를 당하는 등 불이익을 받아도 관련 규정이 모호해 사업주를 처벌하기 어려웠는데, 여가부가 연내 법 개정을 추진해서 성폭력방지법에 성폭력 피해자 ‘불이익 처분’에 대한 규정을 명시하기로 했다.

▶ [관련기사] 성폭력 피해자 위한 법, 있지만 없다

간호사·의사 등 의료인 집단 내 성폭력 대응 방안도 있다. 올해 중 전공의법을 고쳐 ‘전공의 성폭력 예방 및 대응 의무규정’을 만든다. 전공의들을 대상으로 한 성희롱·성폭력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거나 2차 가해를 한 것이 확인되면 해당 의료기관에 과태료를 부과하거나 지원금을 깎는 등 제재한다.

이번 발표에 교육분야에서의 성희롱·성폭력에 대한 대책은 포함되지 않았다. 근로기준법, 노동관계법 등에 따라 노동부가 관리감독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공무원법과 교원법 등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노동부는 “여가부 등과 협의해 검토할 것”이라고만 밝혔다.

■ 문화예술계 100일간 특별조사·특별신고

문화예술분야에서는 특별조사단을 출범시켜 진상을 조사한다. 국가인권위원회와 문체부, 민간 전문가로 구성된 특조단은 이달 중순부터 100일간 조사해 가해자들을 수사 의뢰할 예정이다. 문화예술계 성희롱·성폭력 특별신고·상담센터도 이달 중순부터 100일간 운영된다. 성범죄에 연루된 문화예술인에게는 국가 지원을 끊는다. 상반기 중 문화예술위원회, 예술인복지재단 등 공공단체 공모사업 시행지침을 개정해 성희롱·성폭력을 저지른 사람은 지원에서 배제할 것을 명시한다. 문체부 산하기관과 관련 단체들의 채용규정과 징계규정을 정비하며, 성폭력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거나 방치했을 경우 행정감사를 하고 수사기관에 고발하기로 했다.

문체부는 이달부터 오는 11월까지 문화예술, 영화계, 출판, 대중문화산업, 체육의 5개 분야에서 자체적으로도 성희롱·성폭력 실태조사를 하고 피해사례를 특조단에 인계하기로 했다. 문체부는 또 예술인의 자기결정권을 보호하고 권리를 침해당했을 때 구제할 수 있도록 가칭 ‘예술가의 권익보장에 관한 법률’을 만드는 것도 검토한다.

수사 과정에서 2차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앞으로 성폭력 수사 때 피해자 접촉은 원칙적으로 여성 경찰관이 전담한다. 경찰은 또 전국 경찰 915명을 ‘미투 피해자 보호관’으로 지정해 피해자 상담과 법률지원을 맡게 할 계획이다. 여가부는 공소시효가 이미 끝난 사건이더라도 피해자에게 상담과 의료비, 심리치료 등을 적극 지원하기로 했다.

■ 여성계 “중요한 건 성폭력에 대한 근본 인식”

정부는 성희롱 예방과 처벌에 대한 단일법을 만드는 것도 검토하기로 했다. 신체접촉이 없는 성희롱의 경우 관련 법이 여러 개이고 형사처벌 규정이 따로 없다. 이 때문에 남녀고용평등법 등에서는 가해자를 직접 처벌하지 않고 사업주를 제재하도록 했다. 전문가들은 단일법을 만들어야 성희롱 피해자를 제대로 구제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폭행이나 협박이 있어야만 성폭행으로 인정하는 현행법은 기준이 지나치게 엄격해 가해자를 처벌하기 어렵다는 지적을 받아왔지만, 이 사항은 아직 논의하지 않았다고 정부는 밝혔다. 박균태 국장은 “학계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여론을 수렴해 결정해야 할 문제라서 이번에는 논의 대상에서 제외했다”고 말했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은 이번 정부 대책에 대해 “성범죄 형량을 높여 처벌 의지를 보이는 것은 좋지만 그동안 형량이 낮아 성범죄가 처벌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며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에서 성폭력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재정립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도 “성폭력에 대한 법적 정의를 재검토하지 않은 것은 아쉬운 부분”이라며 “권력형 성범죄에만 집중할 게 아니라 유명인사나 정치인의 성폭력이 아니더라도 모든 성범죄가 근본적으로 성차별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