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취객을 찾아 번화가를 누비는 대리기사들, 고객들의 택배를 현관 앞까지 배송해 주는 택배기사들. 이들은 노동자일까요, 아닐까요.
답은 후자입니다. 발주처에서 위탁·도급같은 계약 형태로 일감을 받는 자영업자 신분이기 때문입니다. 실질적으로 사용자의 지휘·감독을 받는다고 볼 여지가 많지만 고용관계가 불분명하다는 이유 때문에 법으로는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이런 이들을 부르는 법적인 명칭은 ‘특수고용노동자’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대리기사·택배기사 같은 특수고용노동자들은 ‘합법적인 노동조합 활동을 할 수 없는 노동자’입니다. 노동관계법의 회색지대에 놓인 이런 이들은 갈수록 늘고 있습니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끼리 뭉쳐 사용자에게 처우개선 등을 요구할 수 있도록 ‘노조할 권리’를 달라는 목소리도 높아집니다.
전국대리운전노동조합 소속 대리기사들이 28일 서울 중구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노조설립 신고서를 접수하기 앞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이날 일부 노조원들은 “노동자이면서 노동자라 불리지 못한다”는 자조적 의미로 홍길동 복장을 착용했다. _강윤중 기자
8월 28일 대리운전 기사들이 서울지방고용노동청에 노조 설립신고를 냈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조만간 택배기사들도 정부에 “합법적인 노조활동을 보장해 달라”고 요구할 예정입니다. 노동계는 특수고용직의 노조를 인정해줄 것인지가 문재인 대통령이 공약한 노조 조직률 끌어올리기 등 ‘노동존중 정책’의 시금석이 될 것으로 봅니다.
이날 '전국대리운전노조'는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이들은 “대리기사들의 생존권과 노동기본권을 보장하려면 최소한의 단결할 권리를 법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절박한 과제”라고 말합니다.
대리운전업은 1990년대 이후 부쩍 커졌습니다. 지금은 전국의 대리기사가 20만명에 달합니다. '전업 대리기사'가 그 중 70%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들에게 ‘콜 알선’을 하는 대리운전업체만 2만여개입니다. 대리운전노조는 “20여년 동안 계속해서 요금은 낮아지고 업체들은 수수료를 올려 생존권을 위협받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야간노동이 많고 장거리를 걸어서 이동해야 돼 건강이 위협받고 있으며, 술 취한 차주를 상대하느라 감정노동도 심하다”고 했습니다.
이런 문제를 개선할 방법은 대리기사들이 업체와 교섭해 임금과 근로조건을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기업체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어 임금협상을 하는 것처럼. 하지만 2005년 이후 지역별로 설립된 대리운전노조는 대구 지역을 제외하곤 모두 정부에서 노조 필증을 교부받지 못했습니다. 대리기사들은 업체로부터 직접 임금을 받는 것이 아니라 손님에게 받는 돈 일부를 업체에 내고 남은 수입을 자기 몫으로 가져가지요. 이런 계약형태 때문에 노동자임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2012년 전국 단위로 조직된 대리운전노조는 12개 지부에 걸쳐 1000여명이 가입돼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법외노조’입니다. 사용자는 '설립인가를 받지 않은 노조'의 단체교섭 요구에 응할 의무가 없습니다. 이들의 파업같은 쟁의행위는 불법이 돼버립니다. 부당노동행위를 당해도 구제받을 길이 없습니다.
택배노조는 지난 1월 창립총회를 열고 실태조사, 대리점 부당 계약해지 항의 등 활동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역시 설립 필증을 교부받지 못한 법외노조 상태입니다. 택배노조 관계자는 “다른 특수고용직과 마찬가지로 설립 신고가 반려당할 거라는 우려가 있었다”라며 “문재인 정부에서는 받아들여질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노동기본권 사각지대에 놓인 특수고용노동자들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도 산재보험과 고용보험 가입범위를 넓혀 이들을 보호하자는 얘기가 나온 적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계는 이런 방안은 미봉책에 지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노동자 스스로 주도해 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 단체를 만드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특수고용직 노조가 합법적인 지위를 얻기 어려운 이상, 처우를 개선하는 것은 언감생심. 2000년 보험설계사들로 이뤄진 전국보험모집인노조는 설립 신고서를 냈다가 “근로자가 아니다”라는 이유로 반려됐습니다. 2009년 화물차·레미콘·덤프트럭 기사들이 건설노조에 들어가자 노동부는 “노조법상 노동자가 아니다”라며 이들을 제외시키라는 시정명령까지 내렸습니다. 학습지 교사들은 1999년 노조를 만들어 설립 필증까지 받았지만 2014년 서울고등법원이 ‘노동자성’을 부정했고 노조 활동에도 차질이 생겼습니다.
대법원 판례도 노조법상 노동자는 “계약형태가 고용, 도급, 위임 등 어느 형태이든 상관없이 사용자와 노무제공자 사이에 지휘·감독관계 여부 등 그 노무의 실질관계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노조 설립신고를 받는 지자체와 고용노동부는 근로계약을 했는지만 보고 특수고용직도 노동자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법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해석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노조법은 1950년대에 만들어졌습니다. 지금은 사용자와 노동자의 관계를 이전의 틀로는 딱 잘라 구분하기 힘듭니다. 그러니 상황에 맞춰 노조법을 개정해야 합니다. 특수고용노동자들의 ‘노조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국가인권위와 국제노동기구(ILO) 권고사항이기도 합니다. 문 대통령도 이들의 노동 3권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습니다.
국회 환노위에는 이정미 정의당 의원,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이런 권고사항을 반영해 만든 노조법 개정안이 제출돼 있습니다. ‘계약형식과 관계없이 자신이 아닌 다른 자의 업무를 위해 노무를 제공하고 해당사업주 또는 노무수령자로부터 대가를 받아 생활하는 자’와 ‘그 밖에 다른 자에게 노무를 제공하는 자로서 이 법에 따른 단결보호의 필요성이 있는 자 중 대통령령이 정하는 자’ 등 특수고용직 형태까지 노동자로 편입시키는 것을 골자로 합니다.
노조법 개정 이전에라도, 정부가 의지만 있다면 행정지침을 통해 이들의 노조 설립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이용우 민변 노동위 변호사는 “노동자성을 판단하는 핵심 징표는 사용자가 지휘감독을 하는지 여부”라며 “사용자 종속성을 중심에 놓고 노조법을 적극적으로 해석할 여지는 충분히 있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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