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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유해물질 자료에 ‘국가핵심기술’이? 작업환경보고서 공개 막으려 나선 삼성

남지원·이윤주 기자 somnia@kyunghyang.com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주최로 지난해 3월 서울 서초동 삼성본관 앞에서 열린 ‘삼성전자 직업병 문제 해결 촉구’ 기자회견에 1만1299명의 서명지가 놓여 있다. 강윤중 기자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주최로 지난해 3월 서울 서초동 삼성본관 앞에서 열린 ‘삼성전자 직업병 문제 해결 촉구’ 기자회견에 1만1299명의 서명지가 놓여 있다. 강윤중 기자

노동자들이 일하면서 유해물질에 얼마나 노출되는지 분석한 보고서가 공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삼성전자가 발벗고 나섰다. ‘작업환경 측정결과 보고서’ 공개를 막기 위해, 이 보고서에 담긴 내용이 국가 핵심기술에 해당하는지 확인해달라고 산업통상자원부에 요청하기까지 했다. 이미 법원이 “영업비밀이라 볼 수 없으니 노동자와 주민 안전을 위해 공개하라”고 했는데도 버티기에 나선 것이다.

9일 산업부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최근 산업부에 이 보고서 내용이 국가 핵심기술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확인을 요청했다. 보고서에 실린 내용이 ‘국내외 시장에서 차지하는 기술적·경제적 가치가 높거나 관련 산업의 성장잠재력이 높아 해외로 유출될 경우 국가안보와 국민경제 발전에 중대한 악영향을 줄 우려가 있는 기술’에 해당하는지 문의한 것이다.

작업환경 측정결과 보고서는 사업주가 작업장 내 유해물질 총 190종에 노동자가 노출되는 정도를 측정·평가한 결과를 적은 것이다. 사업주들은 6개월에 한 번씩 지방노동청에 보고서를 낸다. 직업병에 걸린 노동자들이 산재 인정을 받으려면 꼭 필요한 자료인데 그동안 정부가 “기업 영업비밀”이라며 공개하지 않았다.

지난 2월 대전고법은 삼성전자 온양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노동자 이범우씨(당시 46세)의 유족에게 보고서를 공개하라고 판결했다. 노동부는 법원 판결을 받아들이고 항소를 포기하기로 하면서 “산재 입증에 필요한 정보는 앞으로 적극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그 뒤 삼성디스플레이 아산탕정공장, 삼성전자 구미공장과 평택공장, 기흥공장 등에서 직업병 피해자들이 보고서 공개를 청구했다. 일부 지방노동청이 공개 결정을 내리자 삼성전자는 국민권익위원회 산하 중앙행정심판위원회에 정보공개 중지 신청을 냈고 행정소송도 제기했다. 삼성전자의 움직임과 맞물려, 청와대 청원게시판에는 갑자기 “보고서 공개에 반대한다”는 청원이 여러 건 올라왔다.

핵심 쟁점은 산재 신청자가 아닌 제3자에게까지 보고서를 공개할 것인지다. 노동부는 대전고법 판결에 항소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고 ‘안전보건자료 정보공개청구 처리지침’도 그에 맞춰 바꿨다. 개인정보를 제외하고 보고서 내용은 모두 공개를 원칙으로 한다고 명시했다. 시민·노동단체들은 작업환경을 투명히 감시해 노동자들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으려면 공개를 원칙으로 삼는 게 맞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보고서에 생산라인의 세부 공정과 사용되는 화학제품의 종류, 조성 등 핵심 기술정보가 포함돼 있어서 이런 내용이 유출되면 기술 추격에 나선 기업들에 악용될 여지가 크다고 본다. 또 생산된 칩의 후공정을 맡는 온양공장과 달리 기흥·화성·평택은 제조의 핵심 공정이 이뤄지는 작업장이어서 같은 선상에서 비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노동부는 법원이 이미 전문가 자문을 거쳐 보고서가 영업비밀이 아니라고 판결했다는 점, 지방노동청들이 정보공개심의회를 열어 사안별로 영업비밀로 볼 만한 사항이 있는지 판단하고 공개를 결정한 것임을 강조한다. 노동부는 9일 “기업의 기술적 노하우는 당연히 보호받아야 하지만, 산재신청자들이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삼성 측의 결단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산업부는 산업기술보호위원회 전문가위원회를 열어 국가핵심기술에 해당하는 정보가 있는지 판단할 계획이다. 산업부가 국가핵심기술로 판단해도 노동부에 정보공개를 막으라고 강제할 권한은 없지만, 노동부와의 소송에서 삼성전자에 힘이 실릴 가능성이 크다. 민변 노동위원회는 성명을 내고 “법원이 이미 영업비밀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결했는데도 보고서 공개를 방해하는 것은 직업병 피해자를 부정하고 피해를 가중시키는 행위”라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