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서비스가 협력업체 직원 약 8000명을 직접 채용하기로 했다.
삼성전자서비스는 17일 진행된 전국금속노조 지회와의 막후 협상을 통해 이런 방안에 합의했다면서 “90여개 협력사에서 8000명 안팎의 직원을 직접 고용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자회사를 설립해 협력사 직원들을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방식이 아니라 직접고용을 통해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이어서 업계에서도 상당히 이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 막 내린 ‘무노조 경영’
삼성전자서비스가 17일 협력업체 노동자들을 직접고용하기로 노조와 합의하면서, 철옹성 같던 삼성의 ‘무노조 경영’ 80년 역사도 막이 내렸다. 그동안 노조를 ‘와해시켜야 할 대상’으로만 봤던 삼성이 노조와 직접고용 방안을 합의한데다 “노조 활동을 보장하겠다”고 공식 선언한 결정적인 계기는 검찰 수사다. 새 정부 들어 고용노동부가 ‘친기업’ 편향에서 벗어나며 태도를 바꾸고 있는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협력업체 노동자들을 직접고용하고 노조 활동을 보장해달라는 것은 삼성전자서비스 노조가 2013년 설립 이후 줄기차게 요구해왔던 것이다. 이 회사는 협력업체를 통해 서비스기사와 콜센터 노동자 등을 사내하청으로 간접고용해왔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실제로는 원청인 삼성전자서비스의 지시를 받아 고객들 집을 방문해 원청에서 교육받은대로 가전제품을 수리하고 설치하는 일을 해왔다. 명목상의 고용주인 협력업체는 노동자들의 임금이나 노동조건, 휴일을 결정할 권한이 없었다. 사내하청 노동자에게 원청 사용자가 업무지시를 내리는 것은 불법이다. 파리바게뜨 운영사가 고용노동부로부터 제빵기사들을 직접고용하라는 시정지시를 받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노조는 위장도급·불법파견이라며 직접고용을 요구했으나 사측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삼성 로고가 찍힌 점퍼를 회수하는 꼼수를 부려가며 불법파견 판정을 막으려 했다. 법원은 오히려 사측의 손을 들어줬다. 노조가 법원에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을 냈지만 지난해 패소했다. 사측에 단체교섭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노동자 2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도 있었다.
▶검, 삼성전자서비스 지사 등 압수수색…노조 와해 의혹 수사 속도전
사측은 여전히 불법파견을 인정하지는 않고 있지만, 이번에 이들을 직접고용하기로 하면서 노조 요구를 결국 받아들였다. 노조 와해 공작에 대해 검찰 수사가 조여오자 입장을 바꾼 것으로 풀이된다. 삼성전자서비스는 검찰수사가 계속 확대되자 3~4일 전 노조와 접촉을 시작해 급하게 물밑합의를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 감시자 역할 하겠다”
삼성 측은 “복수노조 설립이 가능해진 뒤로 사측이 무노조 경영을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고 했다. 노동계는 삼성이 사실상 무노조 원칙 폐기를 선언한 것으로 본다.
과거 삼성은 한 회사에 노조가 1개만 있어야 한다는 법조항에 기대, 노조 설립 움직임이 보이면 이른바 ‘어용노조’의 설립 신고를 먼저 내는 방식으로 막아왔다. 하지만 2011년 복수노조가 허용된 뒤 삼성 계열사들에서 노조 설립 시도가 늘어났고, 사측은 징계·해고와 회유, 소송 등으로 힘겹게 막아오던 판이었다. 현재는 삼성전자서비스를 비롯해 삼성물산, 삼성웰스토리, 삼성에스원, 삼성생명, 삼성증권, 삼성SDI, 삼성엔지니어링에 노조가 활동하고 있다. 이 중 삼성전자서비스 노조가 조합원 700명 안팎으로 규모가 가장 크다.
▶[정리뉴스]최종범·염호석··· 노동자 죽음으로 이룬 삼성전자서비스 정규직화
‘하청업체 비정규직’에서 ‘원청업체 정규직’으로 바뀌게 될 삼성전자서비스 노조는 앞으로 사측과 직접 교헙해 임금·단체협상을 체결할 수 있게 된다. 노사는 앞으로 정규직 전환 범위와 시기를 놓고 세부협상에 나선다. 서비스기사들을 먼저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콜센터직원, 자재업체 직원 등도 순차적으로 전환하기로 노사가 의견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노조는 “민주노조를 지켜왔던 간접고용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승리”라며 “앞으로 삼성의 감시자 역할을 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과반수노조 지위를 확보한 웰스토리와 에스원 노조의 교섭에도 힘이 실릴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서비스는 “이번 결정은 자회사를 세워 협력사 직원들을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기존 방식에 비해 진일보한 것으로,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물꼬를 텄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자평했다. 비슷한 요구가 제기된 다른 대기업들에서도 사내하청 노동자를 직접 채용하는 움직임이 뒤따를 수 있다.
■ 노동부, ‘삼성 유착’ 의혹의 고리 끊을까
노동자들 권익을 지켜줘야 할 고용노동부가 노조 와해 공작이나 노조탄압 등 사측의 부당노동행위에 면죄부를 주는 역할만 해왔다는 비판은 끊이지 않았다. 특히 삼성 계열사 문제에서 노동부의 친기업 성향이 두드러졌다. 삼성 측이 ‘불법파견’ 주장이 제기돼온 삼성전자서비스 하청 노동자들을 직접고용하기로 한 것과는 별개로, 과거 노동부가 ‘봐주기 수사’를 통해 기업 편을 들었던 것은 짚어봐야 한다는 지적이 노동부 내에서도 나오고 있다.
삼성전자서비스 노조가 2013년 6월 17일 불법파견 의혹을 제기하자 6월 24일부터 근로감독관 40여 명을 투입해 수원 본사와 인천, 부산, 수원 AS센터 등 14곳에 대한 수시 근로감독을 실시했다. 하지만 이마트나 현대제철 등과 다르게 ‘특별근로감독’이 아닌 ‘수시근로감독’을 했고, 조사대상 센터를 선정하는 과정에서도 삼성 측의 요구를 받아들였다고 노조는 주장한다. 노동부와 사측의 ‘유착’ 의혹을 줄곧 제기해온 노조는 지난달에도 기자회견을 열고 재차 노동부를 비판했다. 원청이 실적이 부진한 직원을 교육대상자로 선정하고 교육에 참가하지 않으면 조처를 취한다는 공문을 내려보내는 등 노무관리를 직접 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나왔는데도 근로감독에서 이런 것들이 무시됐다는 것이다.
5년 전 수시근로감독으로 14곳을 조사했지만 서울고용노동청은 당시 불법파견 소지가 적은 센터들을 ‘골라’ 수사했으며, 노동부 고위층에 보고가 올라간 뒤 현장조사를 하던 근로감독관들이 축소 압력을 받은 정황이 있었다고 했다. 실제로 “우리는 불법파견이라고 판단했는데 실장 보고가 들어간 뒤 바람이 빠져버렸다”고 말한 당시 근로감독관의 녹취가 공개되기도 했다. 라두식 삼성전자서비스지회 대표지회장은 “5년 전에 근로감독을 제대로 했다면 삼성이 노동부를 우습게 알고 부당노동행위를 계속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단독]삼성SDI 노조 창립 직전 주도자들 해외 보내려 한 임직원들 또 ‘무혐의’
노동부도 문제를 인정하고 ‘적폐청산’에 착수했다. 지난해 11월 출범한 노동부 고용노동행정개혁위원회는 서울고용노동청의 불법파견 근로감독 과정에 대해 조사할 것이라고 최근 밝혔다.
아울러 ‘S그룹 노사전략 문건’ 수사에서 노동청이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한 과정도 조사하기로 했다. 2013년 정의당 심상정 의원이 폭로한 이 문건은 “노조가 설립될 경우 모든 역량을 동원해 조기 와해하라” “문제인력은 밀착관리하라”는 등 노조를 와해시키기 위한 온갖 공작이 집대성돼 있다. 삼성그룹 측은 자신들이 만든 문건이 아니라고 주장했고, 노동청은 이 해명을 그대로 받아들여 2016년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하지만 법원은 삼성이 직접 작성했다고 봤다. 개혁위는 문건 수사를 맡았던 근로감독관들을 불러 수사과정에서 어떤 지시를 받았는지, 왜 불기소 의견을 냈는지 집중 조사해 이번 달 안에 결론을 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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