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모씨는 2011년 11월부터 2013년 1월까지 삼성전자 화성공장에서 일한 협력업체 노동자였다. 반도체 생산라인에 화학물질을 공급하는 CCSS룸(화학물질 중앙공급시스템)에서 설비를 작동하고 관리하는 일을 했다. 수시로 화학물질이 담긴 드럼통을 운반해 공급 설비에 연결하거나 드럼통 위에 고인 물질을 닦아냈다. 드럼통 안에 손을 넣어 연결 호스를 빼내거나 창고 안에 흘러나온 화학물질을 청소하기도 했다.
일한 지 1년3개월 만에 희귀 피부암인 ‘피부T세포 림프종’ 진단을 받았다. 공장에서 늘 만지던 물질들 때문이라고 짐작했지만 전문지식이 없는 그는 자신이 다룬 물질이 뭐였고 얼마나 위험한지 몰랐다. 황씨는 2016년 12월 52세로 사망했다.
근로복지공단은 최근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를 열고 황씨에게 산업재해를 승인해주지 않기로 결정했다. 산재보상보험법에는 업무와 질병의 인과관계를 노동자가 입증하게 돼 있다. 하지만 황씨가 기억하고 있던 몇몇 화학물질 이름, 그가 일한 곳에서 불산 유출사고가 난 적이 있다는 것 정도만으로는 인과관계를 입증할 수 없었다. 황씨 사건을 대리했던 반올림의 이종란 노무사는 “어떤 유해물질에 노출됐는지 입증할 자료가 있었다면 판단이 달라졌을 수 있다”고 말했다.
황씨와 유족들에게 반드시 필요했던, 노동자들이 일하는 환경에 어떤 유해물질이 있고 어떤 공정에서 얼마나 쓰였는지 입증할 자료가 바로 삼성이 공개를 막으려 애쓰는 작업환경측정결과보고서다. 기업들은 고용노동부에 6개월마다 이 보고서를 내게 돼 있다. 노동자들이 어떤 유해물질에 노출됐는지 확인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자료다. 산재 피해자가 병에 걸리거나 숨진 뒤에야 실시하는 역학조사로는 확인할 수 없는 ‘근무 당시의 상황’을 알려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황씨 유족들은 지난 2월 중부지방고용노동청 경기지청에 정보공개를 청구했다. 경기지청은 이 청구를 받아들여 20일 보고서를 공개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지난 17일 국민권익위원회 행정심판위원회가 “보고서 내용이 영업비밀”이라고 주장하는 삼성전자의 집행정지 신청을 받아들였다. 이 결정으로 황씨 유족뿐 아니라 삼성전자 기흥공장과 삼성디스플레이 천안·탕정공장, 삼성SDI 천안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이나 뇌종양을 얻은 피해자와 유족들도 보고서를 받을 길이 막혔다.
같은 날 산업통상자원부 산업기술보호위 반도체전문위원회도 보고서 내용 일부가 ‘국가핵심기술’이라고 판정했다. 노동부는 심의자료를 받아 내용을 검토하고 있다. 산재 피해자에게는 보고서를 공개하되, 국가핵심기술이라고 판단한 측정위치도나 화학물질 사용량은 빼고 나머지 정보만 내주는 방안 등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게 되면 어떤 공정에서 유해물질에 노출됐는지, 공정별로 어떤 상품명의 화학물질을 얼마나 썼는지 알 수 없는 ‘반쪽 보고서’가 될 가능성이 높다. 삼성전자가 정보공개를 막아달라며 낸 행정심판과 행정소송에서도 이기면 산재 피해자가 어떤 유해물질에 노출된 채 일했는지 알 길은 아예 없어진다.
유족들은 앞으로도 산재를 인정받으려면 증거를 조각조각 모으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2007년 백혈병으로 숨진 황유미씨는 엔지니어용 환경수첩에 나온 화학물질 정보, 기흥공장에서 발암물질인 벤젠이 검출됐다는 서울대 산학협력단 조사결과 등을 힘겹게 모은 뒤에야 2011년 산재로 인정받았다. 이종란 노무사는 “산재를 입증할 책임을 노동자에게 모두 맡겨놓고 노동자들이 증거자료에 접근하는 길도 막으면 어떻게 하라는 이야기인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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