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도 오늘도 엄마 생각하면서 버티려고 했는데…집에 가고싶다는 생각을 몇 번을 했는지 셀 수도 없을 것 같다. 엄마 정말 미안해, 버티고 버티고 버티자 이 생각으로 하루하루 지냈는데….” 지난달 16일 오전 6시 사우디아라비아 부근 해상, 한 민간회사의 2만톤급 화학물질 운반선 위에서 3등기관사 구민회씨(25)가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2장 분량의 유서에는 ‘힘들고 고통스럽다’ ‘괴롭힘을 더는 참을 수 없다’는 표현이 되풀이해 등장한다.
선원을 꿈꿨던 청년이 목숨을 끊은 배경에는 탈출도 저항도 불가능한 ‘선상’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벌어진 집요한 괴롭힘이 있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학비가 무료인 해사고를 거쳐 목포해양대에 진학했다. 무사히 실습까지 마치고 졸업해 지난해 11월 ‘승선근무예비역’이 됐다. 승선근무예비역 제도는 항해사나 기관사 면허를 가진 사람이 해운·수산업체에서 일정기간 승선근무를 하면 현역 복무를 한 것으로 인정해주는 대체복무 제도다. 구씨처럼 해양대를 나와 선원이 되려는 이들이 주로 선택한다.
하지만 배를 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선임이 괴롭힌다”고 호소하기 시작했다. 유족들에 따르면 선임은 구씨에게 매일 무리한 업무를 시켰고, 욕설과 폭언을 했다. 잠을 재우지 않고 휴식시간을 빼앗는 일도 많았다. 구씨는 친구들에게 “목 매달고 죽는 척이라도 해야 하나 보다”라는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견디다 못해 지난 2월 회사에 알렸지만 묵살당했다. 구씨는 “괴롭힘이 더 심해졌다”는 메시지를 친구들에게 보낸 다음날 목숨을 끊었다.
유족들은 관리감독이 어려운 승선근무의 특성 때문에 구씨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고 말한다. 병무청이 복무를 관리해야 하지만 망망대해에 떠 있는 민간회사의 배에서 근무하는 이들을 감독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해고를 당하면 현역으로 다시 입대해야 하고, 좁은 해운업계에서 ‘나쁜 소문’이 돌면 전역 후 취업하기도 쉽지 않으니 부당한 대우에 맞서기도 어렵다. 그래서 승선근무예비역들은 배에서 가장 힘든 일을 떠맡거나 가혹행위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복무기간도 36개월로 대체복무제도 중 가장 길다. 복무기간이 끝났지만 배가 정박하지 않아 몇달 씩 더 일을 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유족들과 노동사회단체 ‘직장갑질119’는 근로복지공단에 구씨의 산업재해를 신청할 계획이다. 유족들은 가혹행위를 방조하는 제도 자체를 고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씨의 누나는 “이전에도 승선근무예비역들의 자살이 여러 번 있었다고 들었다. 그때 누군가 문제제기를 했더라면 동생이 이렇게 가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당국에 “근로감독을 강화해달라”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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