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을 모독하는 상사의 폭언에 업무를 못합니다. 퇴사를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억울하고 분해서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기사를 봤습니다.”
지난해 11월1일, 노동시민단체와 전문가들이 연대해 만든 ‘직장갑질119’가 제보를 받는다며 문을 열자 공공기관 직원 ㄱ씨가 첫 이메일을 보냈다. 그를 시작으로, 일터에서 혼자 속앓이를 하던 직장인들이 끊임없이 문을 두드렸다. 지난달 말까지 6개월 간 이메일과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으로 총 1만1938건의 ‘갑질’ 제보가 접수됐다. 하루 평균 66건 꼴이다.
노동전문가 241명이 일요일·공휴일을 제외하고 매일 상담에 응했다. 같은 업계에서 일해도 직장이 달라 뭉치지 못하던 이들을 온라인 모임으로 묶어낸 것은 반 년 활동의 가장 큰 성과다. 지금까지 5개 모임이 만들어져 온라인 게시판 등으로 직접 제보를 받고,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찾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지난해 11월1일 직장갑질119 출범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갑질 근절’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강윤중 기자
규모가 가장 큰 한림성심병원모임(1084명)은 노조 설립까지 이어진 케이스다. 이 병원 간호사들은 지난해 오픈채팅방에서 선정적인 장기자랑 강요, 임금체불, 초과근로 등 실태를 고발했고 12월에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한림대의료원지부를 만들었다. 나머지 네 개 모임은 ‘산별노조’와 비슷하다. 현실적으로 노조를 만들기 어려운 환경에 놓인 사람들이 모였다. 중소병원모임에는 직원이 많아야 5~7명인 작은 병원 노동자 219명이 활동한다.
보육교사 모임에서는 전국 어린이집과 유치원 교사 437명이 문제의식을 나눈다. 프리랜서 신분인 방송작가 등 921명은 방송계갑질119 모임에서 활동한다. 파견회사가 몰려 있는 경기도 안산의 반월공단과 시흥의 시화공단 노동자 44명은 반월시화공단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다. 업종별 ‘단톡방’은 지금도 계속 생겨난다.
반 년 동안 들어온 제보를 유형별로 모아 보니 ‘임금을 떼였다’가 25.73%인 3072건으로 가장 많았다. 최저임금이 큰 폭 인상된 올 1월에는 임금체불 제보가 1000건 가까이 들어왔다. 청소나 김장, 장기자랑 등 업무와 상관없는 ‘잡무를 시켰다’는 제보가 14.76%인 762건으로 뒤를 이었다. ‘직장 내 괴롭힘’ 제보도 1610건(13.49%)에 달했다.
이 제보의 내용과 해결 과정에는 노동자들이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구조적인 문제가 그대로 드러난다. ‘근로감독관이 합의를 종용한다’, ‘근로감독관이 회사 편이다’ 같은 내용의 제보가 지난달에만 487건 접수됐다. 직장갑질119는 “직장인들의 권리의식은 성장하는데 정부기관은 여전히 뒷짐지고 있는 것 아닌지 우려된다”고 분석했다.
▶회사 고발했더니 오히려 ‘갑질 사장’ 감싸···못 믿을 근로감독관
주무 부처인 고용노동부를 통해 문제가 해결된 사례는 한 건도 없었다. 직장갑질119는 “제보 내용 중 22건에 대해 노동부에 근로감독을 요청했지만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 단체 관계자는 “최저임금이 오르자 상여금을 슬쩍 기본급에 집어넣거나 휴게시간을 늘려 임금을 줄이는 ‘꼼수’를 부린 사업장 10곳에 대해서도 법 위반 문제를 제기했으나 노동부는 조치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노동부에 건넨 신고 자료가 사측에 고스란히 넘겨져 제보자 신원이 드러나는 사례까지 나오자, 직장갑질119는 노동부와 정기적으로 열던 간담회도 중단했다.
법보다는 ‘여론’이 가까웠다. 제보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면 사측이 뒤늦게 태도를 바꾼 사례가 여럿이었다. 직장갑질119는 “지난 6개월 동안 ‘갑질 일기’를 쓰고, 증거를 녹음한 후 용기를 내 신고한 이들이 있었기에 직장 갑질이 사회적 화두로 떠오를 수 있었다”고 밝혔다.
‘잡무 지시’나 ‘직장 내 괴롭힘’은 여전히 법적 처벌을 받게 하기가 쉽지 않다. 직장갑질119는 ‘갑질방지법’ 제정 태스크포스(TF)를 꾸리고, 하반기 중 국회를 통한 입법을 추진하기로 했다. 또 전문가 자문을 거쳐 7월쯤 ‘우리회사 갑질지표’를 만들어 캠페인을 벌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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