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0일 찾은 서울 은평구 충암중학교 본관. 1층 현관이 여느 학교와는 사뭇 달랐다. 다른 학교들처럼 중앙 계단과 연결돼 시원하게 트인 것이 아니라 벽으로 가로 막혀 있었다. 벽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사무실이 나왔다. 원래 이 학교를 운영하는 충암학원 이사장 부속실로 쓰이던 곳인데 지난 25일부터 서울시 교육청이 법인 운영을 정상화하려고 선임한 이빈파 임시이사(56)가 쓰고 있다. 이 이사는 “학교 구조부터 학생 위주가 아닌 이사장 위주였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부속실 한쪽 벽에는 이홍식 전 충암고 이사장(76)의 상장과 위촉장 따위가 빼곡히 진열돼 있고, 대형 캐비닛 6개가 한줄로 늘어서 있었다. 캐비닛 문마다 ‘열지 마세요’라는 글과 이 전 이사장의 서명이 적힌 흰색 종이가 붙어 있었다. 2012년 비리로 퇴출된 그가 임시이사 사무실에 들어가 각종 회계 자료들이 보관된 캐비닛을 ‘봉인’한 것이었다. 이빈파 이사는 “25일 처음 출근했을 때는 캐비닛이 열려 있었는데, 주말이 지나 28일 나와보니 봉인돼 있었다”며 “이 전 이사장이 운전기사와 함께 왔다 갔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결국 이 이사는 자신이 퇴근한 뒤 몰래 들어와 캐비닛 속 서류들을 가지고 나가지 못하도록, 이 전 이사장의 서명 위에 다시 자신의 서명을 붙여 재봉인을 했다. 학교를 정상화시켜야 할 이사가 옛 재단측과 ‘봉인 싸움’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잠근 것은 캐비닛만이 아니었다. 사무실 안쪽 이사장실 문도 굳게 잠궈놨다. 열어달라 해도 학교 관계자들은 ‘열쇠가 없다’, ‘열쇠는 이홍식 전 이사장만 가지고 있다’며 발뺌하고 있다. 비리로 쫓겨난 이사장 대신 교육당국이 관리에 나섰음에도 여전히 전 이사장이 학교를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얘기다. 재단 사정을 잘 아는 한 교사는 “이홍식 전 이사장의 직함은 ‘법인실장 겸 명예이사장’인데 이는 정관에도 없는 직함”이라며 “공식 직함도 없는 사람이 아직도 왕처럼 군림하고 있다”고 말했다.
임시이사는 운영 실태 등 기본적인 자료를 달라고 법인과 학교 측에 요구했지만 이마저도 원활치 않다. 법인 살림을 담당하던 사람이 최근 사표를 낸 것이다. 이빈파 이사는 “법인과 학교가 비협조적일 것이라고 각오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며 “기본 자료조차 내놓지 않는 것은 엄연한 업무방해”라고 말했다. 임시이사회는 1일 3차 회의를 열어 캐비닛 봉인과 이사장실 문을 강제로 열지 논의할 계획이다.
1974년 취임한 이 전 이사장은 1999년 공사비로 쓰일 교비 1억1000만원을 횡령하고, 친인척 병역 면제를 청탁하며 뇌물 4000만원을 준 혐의로 구속됐다. 그후 이사장직을 박탈당했다가 2008년 복귀했다. 그 사이 이사장은 그의 아내가 맡았다. 서울시교육청은 특별감사를 한 뒤 2012년 그의 임원취임승인을 취소했다. 감사에서는 회계부정을 비롯한 부당행위가 34건이나 적발됐다. 후임 이사장은 그의 딸이었다.
충암학원은 이후 급식비리가 드러났지만 서울시교육청의 징계 요구에 따르지 않았고, 공석인 이사를 선임하지도 않았다. 결국 교육청은 지난 7일 이사진을 한상구 한국교원대 연구소 전임연구원(58)과 이빈파 이사 등 8명으로 전원 교체했다. 이 이사는 24일 2차 이사회 의결에 따라 상근을 하고 있다. 1969년 개교한 이 학원은 유치원과 초·중·고등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이 전 이사장은 학교 정상화에 협력하기는커녕, 오히려 임시이사들이 자신의 공간을 침범했다고 주장한다. 이 전 이사장은 “내가 학교에 50년 이상 봉직했으니까 전 이사가 모두 양해해서 예우상 학교 나오면 쓰라고 마련해준 내 방”이라며 “내 물건을 건드릴까봐 (종이를) 붙여놓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내 돈 들여 학교에 수백억원(상당의) 공사를 했고, 이사회에서 학교 형편이 되면 다 돌려준다고 공증도 해놨으니 나는 일종의 채권자”라고 주장했다.
또 “임시이사는 예산·결산하고 학교 지원 방안 등을 알아보는 일을 하는 사람인데 학교에서 양해해서 일부 공간을 내줄 수는 있지만 아무 방이나 내놓으라고 할 권한은 없다. 불법으로 내 방을 점유했는데 내가 참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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