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기사 ㄱ씨(53)는 강릉에서 시내버스를 몬다. 오전 6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연달아 이틀이나 사흘을 일하고 하루를 쉰다. 지난해 7월 기사가 과로 끝에 졸음운전을 해 18명의 사상자를 낸 ‘오산교통 버스사고’가 남 일 같지 않다.
지난 2월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ㄱ씨 같은 노선버스 기사도 7월부터는 근무시간이 줄어든다. 노동시간 제한이 없는 특례업종에서 드디어 빠졌기 때문이다. 무제한 노동에 제동을 거는 법이 통과되자 ㄱ씨와 동료들은 크게 반겼다. 그런데 그는 지금 일을 그만둘지 고민하고 있다. 시급 8000원에 연장수당을 합하면 다달이 320만원을 손에 쥐었는데 이제 월급이 200만원 안팎으로 줄어들게 생겼다.
■저임금 그대로이면 ‘월급 반토막’
“일하는 시간을 줄이는 건 당연하다고 봐요. 그런데 일을 적게 해도 먹고살 만큼 시급을 받아야 하잖아요. 어차피 최저임금 정도만 받는다면 차라리 덜 위험한 일을 알아볼까 싶기도 합니다.” 10년 동안 버스 운전대를 잡은 그는 다시 화물차를 몰까 생각 중이다.
특례업종에서 제외된 업종의 노동시간은 오는 7월부터 주당 68시간으로 제한되고, 내년 7월1일부터는 주당 52시간으로 줄어든다. 특례업종이 아닌 300인 이상 사업장들이 올 7월부터 주당 52시간을 지켜야 하는 것과 비교하면 노동시간이 단계적으로 줄어드는 것이지만, 주당 80시간을 넘나들던 것이 68시간으로 줄기만 해도 소득이 급감한다고 버스기사들은 말한다.
운수업계에서는 7월1일 노선버스 운행이 갑자기 줄어 전국 ‘버스대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얘기까지 나온다. 고용노동부는 일정 기간 일을 몰아서 할 수 있게 허용하는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으나 노동자들은 “인력을 충원하지 않은 채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도입하면 장시간 노동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며 반대한다.
한국노총은 노동시간 줄이기가 저임금·장시간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결과가 되지 않도록 ‘원포인트 사회적 대화’를 하자고 지난 9일 정부와 사용자단체에 요청했다. 노사정 대화를 이끌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의 틀이 이제 막 갖춰지는 단계이지만, 노동시간 단축으로 생길 문제들에 시급히 대처해야 하니 일단 머리를 맞대자는 것이다. 한국노총은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이 삶의 질을 끌어올리고 ‘더 많은 일자리’로 연결되도록 노사정이 ‘일자리연대협약’을 맺자고 제안했다.
민주노총의 생각도 비슷하다. 저임금을 유지하면서 연장·휴일근로수당 등으로 보전해주는 시대는 끝났으며, 실질적으로 임금이 떨어지지 않게 하면서 노동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주호 민주노총 정책실장은 “노동시간을 줄임으로써 일자리가 더 늘어날 수 있도록 하고, 노동자들 실질임금이 줄어들지 않게 적극적으로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준비기구는 보건업과 버스운수업 대책을 논의할 업종별 위원회를 먼저 만드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는 “일자리연대협약과 관련해서는 검토 중이며 조만간 입장을 내놓을 것”이라고만 밝혔다.
■특례업종은 ‘장시간 노동’ 계속
ㄱ씨 같은 이들은 소득이 줄까 걱정하지만, 여전히 특례업종으로 남은 곳들은 장시간 노동을 계속해야 한다. 보건업이 대표적이다. 한국노총 전국의료산업노조 조사 결과 병원 노동자의 68.4%가 “연장근무가 일상적으로 발생한다”고 답했다. “시간 외 근로수당을 정확하게 지급받지 않는다”는 사람도 71.8%에 이르렀다. 근로기준법이 고쳐졌지만 5개 업종은 여전히 특례업종으로 남아 있다. 5인 미만 소규모 사업장에는 근로기준법의 노동시간 제한이 적용되지 않는 점도 한계다.
정부는 노동시간 단축에 따른 기업의 신규채용을 지원하고, 노동자들 임금 감소분을 보전하는 대책을 이달 안에 내놓기로 했다. 노동시간을 줄이는 대신 사람을 더 뽑는 300인 이상 기업에 신규채용 노동자 1명당 최대 40만원까지 지원하는 ‘일자리 함께하기’ 제도의 대상을 늘리고, 중소기업 추가고용 장려금 지원을 확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노선버스업과 관련해서는 국토교통부 주관으로 노선 개편 같은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하반기에는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개선하기 위해 실태조사를 하기로 했다. 정부는 노동시간이 줄면 유연성도 동시에 높여서 대응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노동계는 오히려 노동조건이 악화될 수 있다며 반대한다. 하지만 노동시간 단축에 따른 과도기 비용을 노사정이 어느 정도 부담할지를 놓고 줄다리기가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은 “노동시간을 전반적으로 조정하는 과도기에 저임금·장시간 노동자들의 임금이 줄어든다면 정부가 어느 정도는 메워줘야 한다”며 “고용보험기금을 활용해 당장 생활의 압박을 받는 이들을 지원하고, 남은 과제는 장기적으로 풀어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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