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정부는 2020년까지 20만5000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며 공공부문 정규직화 가이드라인을 내놨다. 하지만 ‘비정규직 제로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고 여기저기서 파열음이 들린다. 정규직 전환 대상에서 통째로 제외된 이들도 있고, 자회사 정규직이 됐을 뿐 사실상 간접고용 노동자 신분을 벗지 못한 이들도 있다. 전환 과정을 관리하는 노동자·사용자·전문가협의회가 사측의 거수기로 전락했다고 호소하는 노동자들도 있다. 지난 9일 경향신문사에 모인 공공기관 비정규직 노동자 5명은 입을 모아 “우리는 아직도 희망고문을 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 “정규직으로 퇴직, 기대했죠”
인천공항에서 환경미화원으로 12년 동안 일한 오순옥씨(61)는 문 대통령이 인천공항을 방문했던 날을 잊지 못한다. “그날 새벽에 갑자기 연락을 받았어요. ‘연내에 정규직 전환을 끝내겠다’는 말에 얼마나 기뻤는지. 업체가 3년마다 바뀔 때 느꼈던 불안감, 형편없는 임금과 처우가 곧 나아질 거라고 기대했어요. 청소일 하시는 분들은 나이가 많아요. 다들 마지막 직장이라 여겼고, ‘여기서 노조를 하니 정규직이 돼서 퇴직하겠구나’라고 말하는 분들이 많았죠.”
지난 9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 5명이 ‘비정규직 제로시대’ 선언 1년을 앞두고 각 기관의 정규직 전환 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김선종 공공운수노조 한국마사회지부 사무국장, 박영희 한국잡월드분회장, 최보희 전국교육공무직본부 부본부장, 이태성 발전비정규직연대회의 간사, 오순옥 인천공항지역지부 수석부지부장. 김영민 기자
고용노동부 산하 청소년 직업체험기관 ‘한국잡월드’에서 일하는 5년차 강사 박영희씨(49)도 그랬다. “직업교육 강사들은 역량도 있고 경력도 괜찮은데 매년 재계약을 해야 할 정도로 고용불안이 심해 이직률이 높다”며 “젊은 강사들이 조금만 기다리면 정규직이 될 수도 있다는 기대감에 이직 생각을 접기도 했다”고 말했다.
기대는 차츰 실망으로 바뀌어갔다. 지난해 7월 정부가 발표한 공공기관 정규직화 계획에서는 기간제교사와 영어회화전문강사 등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비정규직들이 통째로 빠졌다.
교육청마다 정규직 전환 심의위원회를 만들어 대상을 결정했는데 전환 비율이 낮았고, 전환 대상에서 제외된 노동자들은 오히려 해고되기도 했다. 고교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교무실무사로 15년간 일한 최보희씨(56)는 “학교에 비정규직 직종이 80개가 넘어 정규직 전환 대상이 어디까지인지 알기도 힘들다”며 “전환 대상자는 10% 수준이고, 전환 대상에서 빠졌으니 계약을 해지한다는 통보를 받은 사람도 많다”고 말했다. 그는 “야간당직이나 청소일을 하시는 분들은 대개 나이가 많은데 전환 과정에서 65세 정년 기준을 일괄 적용하는 바람에 해고당할까 봐 불안해한다”고 덧붙였다.
■ 장시간 노동, 저임금 ‘그대로’
이태성씨(45)는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설비를 운전하고 정비하는 업무를 20년째 하고 있다. 요즘 그는 직접 나서서 싸우지 않으면 정규직이 되기 어렵겠다는 생각을 한다. 화력발전소를 운영하는 발전 5사가 최근 ‘운전·정비업종을 정규직 전환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내용의 노무법인 컨설팅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상시적이고 지속적인 업무를 하고 있지만 ‘생명이나 안전과 직결된 업무가 아니고, 민간업체의 전문성을 활용해야 하기 때문에’ 전환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컨설팅 결론이었다.
이씨는 “우리는 국가필수유지 업무를 하고 있어서 파업권도 없다. 발전소에서 탈황 처리를 하고 미세먼지 저감시설을 돌리는 우리가 ‘생명안전업무’에 해당되지 않으면 누가 생명안전업무를 하고 있다는 건가”라고 말했다.
기관이 사업을 줄이면서 전환 대상이어야 할 비정규직들이 희생양이 된 경우도 있다. 비정규직이 전 직원의 90%에 달했던 한국마사회는 주말에 마권을 발매하는 등의 일을 하던 5600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했다. 공공기관 중에선 인천공항 다음으로 큰 규모로 전환한 셈이다. 하지만 지역 문화센터 운영매니저나 전산직 등 80여명은 전환 대상에서 빠졌다.
한국마사회에서 전산직으로 근무하는 김선종씨(44)는 “지역 문화센터 강좌를 줄여 자리를 없애버리려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전산직은 발전소와 마찬가지로 ‘민간의 전문성’을 활용해야 하는 직종이라서 전환의 예외가 된다는 게 마사회 주장인데, 김씨 같은 이들이 소속된 용역업체는 “월급을 주는 곳일 뿐 전문성이 있는 곳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전환 대상에서 제외된 사람들은 해고될 가능성이 높다”면서 “자회사냐 직접고용이냐를 놓고 이야기할 단계까지라도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인천공항은 3000명을 직접고용하고 나머지는 자회사에 고용하겠다고 했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노동자들의 처우는 나아진 게 없다. 오순옥씨는 “지난해 말 합의서를 썼지만 아직까지 전환되지 않고 있다”면서 “더 큰 문제는 장시간 노동이나 저임금이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환경직은 아직도 주 6일 근무를 하고 있는데 정규직 전환에서 이런 문제는 논의조차 안됐고, 임금을 올리는 것도 합의에 진척이 없다”고 했다.
■ 노동자 의견 반영하랬더니…
정부는 파견·용역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바꿀 때 노동자대표단이 50% 이상 참여한 노·사·전문가협의회를 만들어 방식과 시기를 정하게 했다. 하지만 현장 노동자들은 이 협의체 구성과 운영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사측 의지대로 구성돼 거수기 역할밖에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영희씨는 공공운수노조 한국잡월드분회장 자격으로 지난 3월부터 협의회에 참석하고 있는데 “늘 1 대 19로 싸우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강사들은 직접고용을 원하지만, 정규직 노조와 청소·경비직 대표 등은 회사가 바라는 자회사 정규직 전환을 받아들였다.
박씨는 “회사가 ‘직접고용을 하려면 공개경쟁 채용을 해야 한다’며 협의회가 열리기 전부터 설득을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저는 그냥 ‘목 내놓고’ 싸우고 있는데, 다른 강사 대표는 잘리면 안된다고 해요. 노동자 참여를 보장한다고 만든 제도이지만 1년마다 계약해지 위험을 안고 사는 노동자가 목소리를 내기는 쉽지 않은 거죠.” 자회사 정규직이 되면 고용안정은 보장되지만 임금이나 처우는 비정규직 시절보다 더 나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많다.
이태성씨는 지난해 11월 발전소 집중정비 때 동료를 잃었다. 정비 기한을 맞추려면 시간이 촉박해 점심시간도 없이 일하고 야간 잔업도 해야 한다. 그날도 점심을 마다하고 일을 했는데 운전원의 조작 실수로 동료의 머리가 설비에 끼었다. 동료 역시 용역업체 소속이었다. “용역업체 사람들이 개인 자가용으로 데리고 나갔어요. 살려보겠다고 나갔는데 나가다가 죽었죠. 119를 부르고 조치를 했다면 살 수도 있었다고 생각해요.” 사망사고 같은 ‘중대재해’가 나면 용역회사는 삼진아웃제를 적용받고, 세 번 중대재해를 겪으면 입찰에서 탈락한다. 그래서 “용역업체 소속 비정규직들은 재해를 은폐하는 구조 속에서 일하고 정말 많이 죽어나간다”고 말했다.
이들은 정부가 온전한 정규직화를 위해 나서야 한다고 말한다. 박영희씨는 “아이들이 직업교육을 받으러 오는 곳인데, 질 좋은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도록 ‘좋은 일자리’의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근로감독관이 회의록만 보지 말고 실제로 노동자 대표들을 만나 정규직 전환 과정을 살펴보고, 문제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시정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순옥씨는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겠다고 하는 데에는 노동자의 삶의 질이 높아지길 바라는 문 대통령의 바람이 담겼다고 생각한다”며 “비정규직들이 고용불안과 저임금으로 착취당하는 현실을 실제로 바꿀 수 있는 방식이 되려면 정부가 더 현장에 관심을 갖고 들여다봐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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