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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들 얘기

[기자칼럼]희망이 가져온 변화

8년 전 이맘때는 통일부 출입기자였다. 당시 이명박 정부의 통일부는 ‘약간 과장을 보태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기자생활 중 보람도, 재미도 없던 시기를 딱 1년만 꼽으라면 이때다. 부지런히 기사를 쓰기는 했다. 그러나 지금도 기억에 남는 기사는 없다. 단지 남북관계를 다룬 기사 대부분에서는 ‘단절’ ‘중단’ ‘폐쇄’ ‘불허’ 등의 단어가 핵심을 차지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기자칼럼]희망이 가져온 변화

경향신문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내 이름과 현인택 당시 통일부 장관의 이름을 함께 넣어 검색해보았다. 2010년 5월24일에는 ‘통일부, 대북 신규투자 금지…방북도 불허’란 기사를 썼고, 그 다음날에는 ‘통일부, 체류목적 방북 25일부터 불허’란 기사를 썼다. 두 달 뒤에는 ‘개성공단 체류 80~90명 증원, 실익 없는 생색내기’란 제목으로 위기에 빠진, 그러나 폐쇄까지는 되지 않았던 개성공단의 소식을 전했다. 같은 해 3월 일어난 천안함 침몰사건이 그나마 남아 있던 남북관계 개선 가능성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해 5월24일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홀을 결의에 찬 표정으로 걸어나와 대국민담화를 읽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 상황에서는 북한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기도 쉽지 않았다. 현재 북한의 최고지도자인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8년 전에는 ‘미지의 인물’이었다.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의 셋째아들에게 후계자 자리가 돌아갔다는 소식까지는 나왔으나 얼굴도 몰랐다. 심지어 이름도 김정은인지 김정운인지 명확히 확인되지 않을 정도였다.

김 국무위원장의 후계자 지위가 공식 확인된 것은 2010년 9월28일이었다. 북한은 이날 개최된 당대표자회의에서 김 국무위원장을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하면서 3대 세습을 대내외적으로 공표했다. 김 국무위원장은 2011년 1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한 이후에야 전면에 등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는 인물이었다. 어느 것 하나 명확히 알려진 것이 없었다.

김 국무위원장의 목소리를 처음 들은 것도 2012년 4월이 되어서였다. 그달 15일 북한 김일성 주석 100회 생일을 맞아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열린 인민군 열병식에서 김정은 당시 노동당 제1비서가 연설을 하는 모습이 방송을 통해 공개됐다. 김 국무위원장의 목소리와 외모, 행동을 할아버지인 김일성 주석의 생전 모습과 비교하는 분석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김 국무위원장은 대외적으로 ‘잔인한 면모’를 먼저 보여줬다. 2013년 12월 고모부인 장성택 전 북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을 전격적으로 처형했다. 지난해 2월에는 김 국무위원장의 이복형인 김정남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의 공항에서 독살됐다. 김 국무위원장은 도저히 상종할 수 없는 인물로 전 세계에 각인됐다.

북한의 차기 지도자로 알려진 뒤에도 10년 가까이 ‘미지의 인물’이었고 ‘미친 독재자’였던 김 국무위원장이 지난봄부터는 한국의 언론에 쉴 새 없이 등장하고 있다. 지난 4월27일과 지난달 26일에 연달아 열린 남북정상회담, 지난 12일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의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대화가 가능한’ 북한의 지도자로 인정을 받았다. 앞으로도 갈 길이 멀어보이지만, 그는 어쨌든 밖으로 나왔다. 남북관계는 지난해에 비하면 상전벽해 수준이 됐다. 최소한 당장 내일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사라졌다.

따지고 보면 이런 변화는 지난해 5월9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시작됐다. 대부분의 정치인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북한의 독재자를 비난할 때 누군가는 희망을 이야기했고, 유권자들은 그 희망을 선택했다.

13일 1년여 만에 다시 선거가 치러졌다. 지방선거를 통한 선택은 어쩌면 대통령보다 우리 삶에 더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유권자들의 이번 선택은 또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