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오후 서울 종로구 혜화역에서 열린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에 취재를 다녀왔습니다. 다음 카페 ‘불편한 용기’가 주최하는 세 번째 집회입니다. 유례 없이 많은 여성들이 모인 데다, 방식도 굉장히 새로웠습니다.
기사에 다 담지 못한 현장 분위기를 부족한대로나마 전하고자 합니다. (저도 공부하는 중입니다...)
첫 집회 때 경찰은 “500명이 모일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앞서 두 차례에 걸친 집회에 수만 명이 모였습니다.
세 번째는 더 늘어날 분위기였습니다. 트위터와 불편한용기 카페를 보니 전국 각지에서 차량을 대절해 이 집회에 참가하겠다는 여성들도 많았습니다.
이날 낮기온은 최고 30도까지 올라갔습니다. 이렇게 뜨거운 날…. 오후 3시부터 혜화역에는 빨강 옷을 입은 여성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자이루~!”
혜화역 근처에선 ‘스태프’ 명패를 단 여성들이 확성기를 들고 먼저 이렇게 인사를 하며 참가자들을 안내했습니다. 스태프들에게서 ‘프로페셔널리즘’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화장실 안내 담당자, 흡연구역 안내 담당자 등이 다 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2000년대 유행어인 인삿말 ‘하이루~’는 “자이루~”로 바꿔 씁니다. 이 집회에서 ‘나이스~’는 “자이스~”로, 고맙다는 뜻의 일본말인 ‘아리가또~’는 “자리가또~”로 바꿔서 통용됩니다. 참가자들은 서로를 “자매님” 혹은 “성림”으로 부릅니다.
이 용어들의 '어원' 따라잡기는 쉽지 않습니다. 일단 상대방의 행동을 거울에 비춘 듯 반대로 되돌려 주는 ‘미러링’을 기본으로 한다는 것은 꼭 알아둬야 할 것 같습니다.
주최측은 '자이루'를 '자매님'+'하이루'라고 설명합니다. 맥락을 살펴 보면 이 용어는 '자이루'는 아프리카TV와 유튜브를 통해 1인미디어를 운영하는 BJ 보겸이 쓰는 인삿말인 ‘보이루’에 대항(미러링)해 만든 것이기도 한데요.
잠깐 부연하면 '보이루'는 문제적인 유행어입니다. 이 말을 유행시킨 BJ 보겸은 '보이루'란 '보겸'과 '하이루'를 합쳐 만든 것이고 여성을 비하하는 의도는 없다고 여러 번 밝혔습니다만, 여성혐오 논란은 끊이지 않습니다.
온라인에서는 여성 성기를 뜻하는 '보지'의 '보'를 붙여서 여성을 비하하는 신조어가 계속 만들어지고 있는 상황이고요. 온라인 게임에서 남성 유저가 여성 유저를 마나면 '보이루' 하고 인사한다든지, 여학생을 괴롭히기 위해 남학생들이 일부러 '보이루' 라고 말을 건다든지 하는 식으로 실제 사용 맥락이 이미 여성혐오적이 됐단 지적도 나옵니다.
(넷 세상에서 '진화하는 말'은 맥락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단순히 '보지'의 '보'를 붙였다고 다 혐오 단어는 아닌 것이... '여성들의 힘을 보여주자!'는 뜻으로 일부러 여성들이 만들어 쓰는 '보력'도 있거든요.)
설명이 길었습니다. 저도 계속 공부해야 하는 내용입니다.
취재 온 사람은 시위대 맨 앞 무대 근처 부스에서 명패를 받아 달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주최측은 이 집회에 ‘생물학적 여성’만 참가할 수 있다고 공지했습니다. 부스에 가 보니 남성 기자분들도 등록을 하고 있었는데, 펜스 바깥에서만 취재를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는 참가자들은 얼굴은 드러나지 않게 처리하고, 참가자들 개인 인터뷰는 하지 않을 것 등에 동의하는 사인을 하고 명패를 받았습니다. ‘생물학적 여성’인 저...는 펜스 안에 들어가서 취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자매님들 우리 울어도 혼자 울지말고 울어도 혼자 울지 맙시다. 그리고 절대 죽지 맙시다. 구호 한 번 외치겠습니다. 불편한, 용기가, 세상을, 바꾼다!”
여성들의 현장 발언은 절규에 가까웠습니다. 마이크를 번갈아 쥐는데 어떤 때는 발언자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왜 이 집회에 나왔을까. 참가자들이 들고 나온 몇몇 손팻말로 대신 전해봅니다.
“현재 혜화역에 이만 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오후 4시. 무대에서 마이크를 든 주최측 사회자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뙤얕볕 아래 줄지어 앉은 여성들이 “자이스!” 하고 화답했습니다. 그 목소리에는 분노와 절규, 자긍심이 뒤섞여서 나타나는 것 같았습니다. 참가자는 이 때도 계속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주최측에서는 물과 상비약 등을 준비해 뒀다고 알렸습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으면 주변 스태프들에게 알리라고 공지했습니다. 물도 준비했지만 양이 충분치는 않으니 탈수현상이 있는 사람에게 나눠 주겠다고도 공지합니다.
집회 참가자가 아닌 사람은 펜스 안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여성 경찰들이 곳곳에서 시민들을 안내했습니다.
집회의 전 과정은 마치 잘 기획된 축제 같았습니다. 불편한용기 카페에 가 보면 역할을 나눠 각자의 재능을 얼마나 잘 활용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홍대 몰카 사건에 대한 경찰 수사가 “편파 수사가 아니다”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최근 발언에 참가자들은 큰 분노를 표시했습니다.
현장에서 통용되는 용어 가운데 비판 수위가 가장 높은 것은 “재기해” 입니다. 고 성재기씨가 2013년 ‘남성연대’에 지지를 호소하면서 마포대교에서 투신했다 숨진 사건을 빗대 쓰는 말입니다.
문재인 대통령 발언을 비판하는 대목에서 “재기해!” 구호가 현장에 울려 퍼지기도 했습니다. 주최측에선 “사전적 의미의 ‘재기’입니다”라고 설명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남초집단’인 경찰은 이 문제에 있어 공정할 수 없다고, 여성 경찰을 늘리고 고위직에도 여성을 올리라는 목소리도 크게 터져나왔습니다.
오후 5시무렵 저는 광화문광장에서 열리는 ‘낙태죄 폐지·위헌 촉구 퍼레이드’ 취재를 위해 자리를 떴습니다.
광화문 집회와 행진 풍경은 제게 혜화역보다는 익숙한 것이었습니다. 참가 단위별로 울긋불긋 깃발을 휘날리고, 성소수자 단체들을 포함해 다양한 성별의 사람들이 참여했고, 아이를 데리고 나온 사람도 많았습니다. 혜화역엔 없던 장면입니다.
혜화역 시위 참가자는 5시 이후에도 계속 늘어서 6시에는 주최측 추산 6만명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경찰 추산 1만9000명)
이날도 현장에서는 삭발식이 있었는데요. 끝까지 현장에 남았던 이유진 기자가 취재한 내용을 일부 전합니다.
이날 머리를 깎아주는 데 나선 미용사 한 분은 주최측으로 참여하는 20대 여성의 어머니였다고 합니다. 이 분이 무대에서 했던 얘기는 이렇습니다.
“삭발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세상에 외치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미래가 밝음을 보았습니다. 오늘 제 딸과 함께 참가했는데 제 딸 옆에 이렇게 멋지고 똑똑한 자매들이 많아 든든합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돼 기쁘고 젊은 친구들이 마음놓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저도 힘을 합치겠습니다. 우리 딸들 사랑해,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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