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오송역에 있는 승차권 자동발매기의 작동부는 지상에서 1m37㎝ 높이에 있다. 휠체어를 타고 있을 때 손이 닿기는 하지만 조작하기에는 상당히 불편하다.
패스트푸드점인 맥도널드에 있는 무인 자동주문단말기(키오스크)는 모든 작동이 터치스크린으로만 이뤄진다. 터치스크린은 성인들이 서서 작동할 수 있는 위치에 설치돼 있다. 휠체어에 앉아서는 화면을 누르기조차 쉽지 않다. 화면을 누를 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아 시각장애인은 사용할 수도 없다.
몇년 전만 하더라도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무인단말기는 은행 현금자동입출금기(ATM)나 지하철 승차권 판매기 정도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영화관, 병원, 공항 등 거쳐 패스트푸드점에도 무인단말기가 늘어났다. 주문받는 인력을 줄여 인건비를 절감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하지만 기술을 통해 ‘효율’을 높이고 비용을 줄이려는 시도에서 ‘사람’이 소외된다면? 맨 먼저 소외를 당하는 사람들은 ‘인프라 약자’인 장애인들이다. 장애인단체들이 꾸준히 무인단말기 개선을 요구하고 있으나 이미 보급된 기기를 다시 바꾸기는 쉽지 않다. 법으로 강제하지 않는 한 개발비용을 스스로 부담할 업체는 없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기술을 개발해 공공기관부터 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는 무인단말기로 교체하고 민간에도 파급시켜야 한다고 지적한다.
5일 서울역에서 휠체어에 탑승한 한 장애인이 승차권자동발매기를 이용해 승차권을 사려고 애쓰고 있다. 장애인들의 이용 편이를 고려해 설계돼 있지 않아, 카드를 삽입하는 단계에서부터 적지않은 불편을 겪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지난달 31일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에서는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주최로 ‘무인단말기(키오스크) 장애인 접근성 보장을 위한 토론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문현주 충북대학교 초빙교수는 오송역, 청주국제공항, 맥도널드 충북 청주 분평점, 충북대 등 농협 ATM기 6개 부스의 접근성을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민간기업인 맥도널드 매장은 물론이고 한국철도공사와 한국공항공사가 운영 중인 무인단말기도 장애인들은 이용하기 어려웠다. 처음부터 설계에서 장애인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기계
오송역 승차권 자동발매기의 높이는 1m37㎝ 이하여서 휠체어 사용자의 손이 닿지만 앉은 자세로 조작하기에는 터치스크린과 작동부가 너무 높았다. 특히 디스플레이가 사용자 쪽으로 기울어져 있지 않아 아래쪽에서 정보를 보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또 스크린에서 터치를 하면 무조건 실행되는 방식이기에 시각장애인은 원하는 대로 실행됐는지 바로 확인할 수 없었다. 가까스로 승차권을 구매해도 승차권이 열린 공간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바람에 날아갈 수 있다는 우려도 지적됐다.
청주국제공항 ‘셀프체크인 기기’는 모든 작동이 터치스크린으로만 이뤄진다. 모든 정보가 화면에 표시되는데 소리나 점자같은 대체 콘텐츠가 없어 시각장애인은 쓸 수 없었다. 터치스크린의 숫자 키패드는 전화기용 키패드 배열과 달라 ‘표준을 따르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았다.
맥도널드의 자동주문단말기는 휠체어에 앉아서는 터치스크린을 누를 수도 없었다. 메뉴 선택, 화면 전환, 카드 배출같은 동작을 해야할 때 소리나 진동 등의 피드백이 없어 시각장애인은 사용할 수 없었다. 카드를 잘못 넣었을 때 카드를 뽑으라는 화면 표시만 나올뿐 자동배출하지 않았다. 카드를 잡아당기기 어려운 장애인에게는 이조차도 장벽이 될 수 있다. 농협 현금자동입출금기는 상대적으로 양호했다. 대부분의 단말기가 ‘금융자동화기기 접근성 지침’을 적용하고 있었다. 다만 제한시간을 넘기면 자동으로 화면이 전환돼, 몸의 움직임이 어렵거나 추가 시간이 필요한 이들은 불편할 수 있다.
맥도널드사는 “키오스크 화면에 장애인을 위한 버튼을 누르면 휠체어에 앉은 눈높이에 맞춰 화면이 축소, 아래로 이동되는 기능을 지난 2월부터 도입했다”며 “휠체어 장애인 뿐 아니라 시각 장애인들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키오스크 기능을 개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토론회에 참석한 임상욱 한국장애인연맹 조직국장은 “휠체어를 쓰는 지체장애인이나 뇌병변장애인을 위해 구조적인 측면에서 접근성이 보장돼야 한다”며 “지금 있는 무인단말기는 높이도 높지만, 기울어져 있으면 버튼이 닿지 않아 조작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임 국장은 전동휠체어를 사용하는 1급 뇌병변장애인이다. 그는 “터치스크린식 단말기가 늘고 있는데 손이 떨리는 뇌병변장애인은 오작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면서 “버튼식 조작기능을 함께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문 교수는 “터치스크린은 시각장애인이나 움직임이 어려운 지체장애인, 노인들이 쓰기 어려운 장치”라며 “터치스크린으로만 입력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키보드나 키패드를 함께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다양한 사용자가 다양한 감각을 활용해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화면뿐 아니라 이어폰단자를 설치해 음성 정보를 함께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기술개발, 정부가 의지 보여야
김석일 충북대 소프트웨어학과 명예교수는 “공공 무인단말기가 장애인 접근성의 중심이 돼야 한다”며 “공공분야에서 먼저 필요한 기술이 축적되면 자연스럽게 민간 부분으로도 이어진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장애인 접근성은 영세한 단말기 제조업체들이 감당하기 어렵다”며 “기술적 난이도보다는 정부의 의지에 달린 문제”라고 했다. 김훈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정책연구원은 “어느 정도 이상 목소리가 커지면 그제야 대책들이 나오고, 그렇다 보니 처음부터 접근성을 고려해 만드는 것보다 더 많은 비용과 노력이 들어간다”고 지적했다.
시급한 것은 법적 강제력이다. 김석일 교수는 “무인단말기 이용고객 중 장애인 비율이 낮다는 점 때문에 장애인 접근성은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며 “장애인들의 구매력을 높이거나 법률로 장애인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강제하는 것 외에는 대책이 없다”고 말했다. 미국은 민간 영역에서 무인단말기의 접근성 보장을 시장에 맡기는 대신, 금융권 ATM이나 공항에 설치된 기기는 장애인들이 쓸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지난 2월 김수민 바른미래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장애인차별금지법 개정안’은 터치스크린 등 전자방식 무인단말기를 설치·운영할 때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게끔 의무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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