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2일은 문송면군 기일이자 ‘반올림’ 농성투쟁 1000일
ㆍ원진레이온에서 삼성반도체·쌍용차까지…이 땅의 일터 곳곳에서 비극 이어져
ㆍ작년 산재 사망 1957명…유해한 작업환경·위험의 외주화·취약한 안전망 여전
30년 전 ‘서울에 가서 돈을 벌며 야간학교를 다니겠다’며 상경한 15살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영등포의 온도계 공장에서 환기시설도, 보호장비도 없이 온도계 안에 수은을 넣는 일을 했다. 건강했던 소년은 일을 시작한 지 두 달 만에 전신 통증과 극심한 불면증이 생겼다. 직업병이라는 개념조차 생소했던 주위 사람들은 “귀신이 씐 것 아니냐”는 말까지 했다.
1987년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일했던 문송면군은 1988년 3월 수은중독과 시너중독으로 추정된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해 7월2일 문군은 입원치료를 받다 숨졌다. 15살 어린 노동자의 장례는 ‘산업재해 노동자장’으로 치러졌다. 그의 죽음은 노동자들이 얼마나 위험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지, 일터의 안전을 지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비슷한 시기, 경기도의 합성섬유 공장 원진레이온에서도 노동자 수백명이 이황화탄소에 중독돼 수십명이 숨지는 일이 벌어졌다. 노동단체들은 원진레이온 직업병 피해자가 915명이며 사망자는 230명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문송면의 죽음은 직업병임을 인정해달라는 이들의 투쟁에 기름을 끼얹었다.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1990년 산업안전보건 관련 제도의 틀이 마련됐다.
매년 1900명이 죽는다
문군이 사망한 지 30년, 그사이 노동자들이 일하는 환경이 나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일터에서 죽어가는 노동자들은 아직도 너무 많다. 지난 한 해 동안 산업재해로 사망한 노동자는 1957명. 수은을 만지던 문송면과 이황화탄소를 다루던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처럼, 아직도 자기가 다루는 물질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는 채 일하는 사람들이 많다.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2007년 숨진 황유미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벤젠이나 포름알데히드 같은 발암물질을 쓰는 공정에서 일했지만 그런 물질이 백혈병을 일으킬 수 있다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황유미씨 사건 이후 11년간 삼성 반도체나 LCD공장에서 일하다 직업병으로 추정되는 이유로 죽은 노동자는 118명이나 된다. 삼성 직업병 문제 해결을 요구해온 ‘반올림’은 문군의 기일인 2일 농성투쟁 1000일째를 맞는다. 문군의 30주기를 앞두고 노동계와 시민사회단체들이 조직한 ‘문송면·원진레이온 노동자 산재사망 추모조직위원회’는 최근 발족 선언문에서 “2018년에도 문송면이나 원진레이온 노동자들과 닮은꼴로 죽어가는 이들이 나오고 있다”고 비판했다. 추모조직위는 1일부터 ‘살아오는 문송면, 함께 걷는 황유미’라는 이름의 캠페인을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회사가 알려주지 않으면 자기가 어떤 유해물질 속에서 일하는지 알기 어렵다. 일하다 아파서 죽어가더라도 직업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입증하기조차 곤란하다.
노동자들이 요구하면 작업공정에 쓰이는 화학물질 정보를 기록한 작업환경측정보고서를 공개하기로 정부가 최근 방침을 바꿨지만, 삼성전자는 행정법원에 소송을 내가며 정보공개를 필사적으로 막고 있다. “영업비밀이 포함돼 있다”는 이유다.
삼성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한국타이어 공장에서는 1996년부터 지난해까지 최소 160명이 암이나 심근경색 등으로 숨졌다. 노동자들은 타이어를 만드는 과정에서 유해물질이 나온다며 진상조사를 다시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하도급과 ‘죽음의 외주화’
지난해 5월1일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800t급 골리앗 크레인과 32t급 타워크레인이 충돌했다. 지지대가 꺾인 타워크레인이 노동자 휴게실을 덮쳤다. 사망자들은 모두 노동절인데도 쉬지 못하고 일하던 하청노동자였다. “골리앗 크레인과 타워크레인, 수신호를 주는 노동자의 신분과 소속회사가 각각 달라 사인이 맞지 않아서 사고가 난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2007년부터 지난해 9월까지 조선업에서 사고로 숨진 324명의 80%가 하청업체 소속이었다. 노동자를 직접 고용한 하청업체만 책임을 짊어지는 구조에서 대기업들인 원청은 안전관리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다치거나 숨진 노동자와 유족이 기업에 책임을 추궁하기도 어렵다.
인건비를 줄이기 위한 다단계 하도급 구조는 위험한 작업을 가장 취약한 하청노동자에게 떠넘기는 ‘위험의 외주화’를 낳는다. 지난 3월28일 경기 남양주시 이마트 다산점에서는 무빙워크를 점검하던 21살 하청업체 직원이 기계에 끼어 사망했다. 그는 이마트의 무빙워크 점검을 담당하는 ㄱ사의 협력업체인 ㄴ사 소속이었다. 서울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사망한 19살 김군도 서울메트로가 아닌 협력업체 소속이었다.
업무 실적을 강요받거나 과도한 업무로 스트레스에 시달려 스스로 세상을 떠나는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계속 나온다. 지난해에는 전북 전주의 한 통신회사 콜센터 상담원으로 근무했던 17살 특성화고생이 실적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했다. 아빠에게 “콜수를 못 채웠다”고 하소연한 뒤였다. 지난 1월에는 한 온라인 강의업체 직원이 살인적인 야근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실업급여나 재교육 같은 사회안전망이 취약한 사회에서 해고자들은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린다. 노동자들의 쟁의행위를 곱게 보지 않는 사회 분위기와 국가가 앞장선 폭력은 치유하기 힘든 트라우마를 심는다. 2009년 노동자 2000여명이 구조조정으로 쫓겨난 쌍용자동차에서는 9년간 무려 30명이 숨졌다. 지난달 27일 자살을 택한 해고노동자 김모씨(48)는 빚을 갚기 위해 밤에는 화물차를 운전하고 낮에는 공사장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왔던 것으로 전해졌다. 군산공장 문이 닫히면서 한국지엠에 희망퇴직을 신청한 노동자들 중에서도 이미 3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산업안전보건법 전면 개정안, “처벌 과하고 영업비밀 침해” 경영계 반대로 발 묶여
정부가 산업재해 사망률을 절반으로 줄이기 위해 추진하고 있는 산업안전보건법 전면개정 작업이 경영계 반대로 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1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산업안전보건법 전부개정안은 지난 3월 입법예고가 끝난 뒤 지금까지 총리실 산하 규제개혁위원회에 묶여 있다. 정부 발의 법안은 입법예고와 규제심사, 법제처 심사를 거친 뒤 국무회의에서 의결해 국회에 제출한다.
노동부는 원래 상반기 중 국무회의 의결을 마치고 하반기 국회에 개정안을 낼 예정이었지만 규제심사가 늦어지면서 국회 제출 시기도 장담할 수 없게 됐다.
1990년 이후 28년 만에 전면 손질되는 새 산안법은 법이 보호하는 대상을 ‘근로자’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넓혀 택배기사 같은 특수고용노동자들도 포괄하게 했다. 원청의 안전관리 책임을 대폭 늘렸고, 노동자가 숨지면 원청 사업주를 1년 이상 7년 이하의 징역이나 1억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도록 했다. 지금까지 원청 사업주는 사망사고가 나도 1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 벌금이라는 가벼운 처벌만 받았다.
중금속 제련 같은 유해한 작업은 도급 자체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기로 했다. 화학물질을 쓰는 작업장에서는 노동부에 ‘물질안전보건자료’를 반드시 내도록 했다. 개정안에 대한 정부 심사가 지지부진한 이유는 경영계가 “처벌이 지나치고 영업비밀이 침해당할 수 있다”며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총은 지난 3월 노동부에 산재 사망에 대한 처벌이 과도하며 유해작업 도급을 금지하는 것은 계약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의견서를 냈다. 물질안전보건자료 제출에 대해서도 “영업비밀이 제3자에게 제공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대로 노동계에서는 노동자 대표에게 작업중지권을 주고 도급 금지 대상을 더 늘려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노동부 관계자는 “정부 심사를 빨리 마치고 하반기 국회에서 법이 통과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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