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 기간제로 입사한 ㄱ씨(30)는 정부의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에 따라 정규직이 됐다. LH로고가 박힌 사원증을 받고서야 정규직이 됐다는 걸 실감했다. 도시건축사업단 방치건축물정비사업부에서 일하는 ㄱ씨는 오랫동안 방치된 건축물들의 정비를 지원하는 일을 한다. 기간제 노동자가 1~2년 새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는 “입사할 때까지만 해도 내 업무의 결과를 하나도 보지 못하고 퇴사할 줄 알았는데, 이제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말했다.
LH는 지난해 기간제노동자 1261명을, 올해 파견·용역노동자 1722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했다. 노사 논의 끝에 필기시험과 역량평가, 면접심사를 거쳐 절대평가 방식으로 전환대상자를 결정했고, 대상자의 80% 가량이 심사를 통과해 사원증을 받았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는 업무의 차이라기보다는 사소한 것들이었다. 비정규직은 사원증이 없었고, 자기 이름으로 기안을 올릴 수도 없었다.
13만3000명 전환…75.8% 완료
고용노동부가 지난해 7월20일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을 발표한 지 1년이 지났다. 1년간 중앙행정기관과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에서 13만명 넘는 직원들이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그동안 공공부문이 비용절감에 치중하며 기간제·파견·용역을 늘리면서 늘상 고용불안에 시달리던 비정규직들은 이제 불안한 신분을 벗어났다.
고용노동부는 지난해 7월부터 올 상반기까지 공공부문에서 13만2673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했다고 19일 밝혔다. 2020년까지 전환하기로 했던 인원 17만4935명의 75.8%에 해당한다. 기간제노동자들은 예정 인원 7만2354명 중 6만6745명(92.2%)이, 파견·용역노동자는 예정 인원 10만2581명 중 6만5928명(64.3%)의 정규직 전환이 끝났다. 기간제노동자 중에는 사무보조원과 연구보조원, 의료업무 종사자가 많고 파견·용역노동자는 시설물 청소원이나 관리원, 경비원이 다수를 차지한다.
기관별로 보면 중앙행정기관과 공공기관, 지방공기업의 정규직 전환 완료율은 65~90% 수준으로 높은 편이지만, 지자체 파견·용역 노동자만 아직 전환율이 22%에 그친다. 지자체들이 지난달 지방선거가 끝난 뒤에야 노·사·전문가 협의체를 구성하는 등 전환 절차를 밟고 있기 때문이다. 기간제와 달리 파견·용역은 기존 소속 업체와의 계약이 끝나는 시기가 제각각이고 이해관계도 복잡해 정규직 전환에 시간이 걸린다. 노동부는 “최대한 빨리 기간제의 정규직 전환을 마무리하고 하반기에는 파견·용역 부문에 집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안정감과 소속감이 생겼다”
노동부가 이날 발간한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 사례집’에 소개된 이들은 정규직이 된 뒤 “안정감과 소속감이 생겼다”고 입을 모았다. 주 1~2일 근무하며 경마장 마권 발매 업무 등을 담당하는 ‘시간제 경마직’ 황규은씨는 “지금까지는 마사회 구성원이라는 소속감이 없었는데 이제 조직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소속감이 자연스럽게 일에 대한 책임감으로 발전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부산대병원 간호부에서 환자 이송과 병동 보조업무를 하는 이강씨는 “남들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병원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지만 그런데도 뭔가 늘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제 ‘앞으로는 점점 더 좋아질 것’이란 희망이 생겼다”고 했다.
같은 병원 의생명연구원 연구지원팀에서 기간제 계약직으로 일하다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된 서지영씨는 “전환이 안 되면 부산을 떠나야 할 상황이었는데 정착할 수 있게 됐다”며 “업무 중 하나인 문서 보관을 어떻게 하면 오래도록 효율적으로 잘 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기간제로 일할 때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경기도청 일자리지원과의 김인숙씨는 “기간제로 일할 때는 업무를 보조하는 역할을 했는데 지금은 전문성 있는 업무를 맡게 됐고, 책임감도 커졌다”고 말했다.
매년 재계약 시기마다 고용불안에 떨었던 파견·용역직 노동자들은 “처음으로 마음 편히 재계약 시기를 보냈다”고 했다. 정부청사 관리총괄과에서 용역사 소속으로 5년째 일하다 정규직이 된 김응조씨는 “전에는 ‘여차하면 재계약 안해준다’는 말을 늘 들으며 일했다. 해마다 12월이 되면 늘 마음이 불안했고 재계약이 돼도 사기가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는데 요즘 ‘고용안정’이라는 말을 실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청사 미화원 유춘자씨도 “해마다 재계약을 할 때면 조마조마했는데 올해 처음으로 마음이 편안했다. 65세 정년이 보장돼 동료들끼리 ‘건강관리 잘 해야겠다’는 우스갯소리도 한다”고 했다.
파견·용역직들의 주먹구구식 임금체계가 손질된 곳도 있다. 정부청사관리본부는 파견·용역 2435명 전원을 정규직으로 바꾸면서 10개 청사 임금체계를 일원화했다. 한국철도공사는 청소·경비노동자 3750명을 정규직으로 고용하고 최하위 기본급을 월 162만원으로 하는 임금체계를 만들었다. 8월1일자로 정규직이 되는 경기 광주역 청소노동자 허순복씨는 “용역업체에 고용돼 있을 때는 매년 계약을 새로 하고 월급도 주는 대로 받아야 했는데, 앞으로는 정해진 체계에 따라 월급을 받을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노동부 관계자는 “공공부문 경영혁신에서 효율성과 함께 ‘인간중심’을 목표로 삼자는 것이 정규직 전환의 뜻”이라며 “고용과 노동의 질을 개선시키면 노동자들의 사기를 올려 궁극적으로는 대국민 공공서비스의 질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비정규직 제로시대’는 오지 않았다…여전히 소외된 사람들
“딸이 기간제교사를 할 때를 생각해 봅니다. 정규 교사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아침 7시가 되기 전 집을 나서고 매일 밤 늦게야 집에 돌아왔습니다. 기간제교사도 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고 똑같이 일을 합니다.” 지난 18일 청와대 앞, 세월호 희생자인 기간제교사 고 김초원씨 아버지 김성욱씨가 마이크를 잡았다. 이날 기간제교사노조는 “정규직 전환에서 제외된 기간제교사와 강사들의 지난 1년은 고통과 분노였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했다.
정부는 지난해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면서 기간제교사와 영어회화전문강사·초등 스포츠강사 등은 정규직화 대상에서 제외했다. ‘다른 법령에서 임용 기간을 정하고 있다’는 게 근거였다. 공공부문 전체 비정규직 41만6000명 중 각 기관이 정규직으로 전환할 수 있다고 잠정집계한 인원은 17만5000원이다. 고용노동부는 여기에 ‘추가전환 여지’ 3만명을 더해 2020년까지 20만5000명을 정규직으로 바꿀 예정이다. 하지만 공공부문 비정규직 절반 이상은 기간제교사처럼 아예 전환 대상에 오르지 못했다. 학교비정규직노조는 20일 기자회견을 열고 “무기계약직으로 바뀌는 노동자가 너무 적다”고 항의하고 정규직 전환 폭을 확대하라고 요구할 계획이다.
‘상시·지속적 업무’와 ‘생명·안전과 직결된 업무’를 하는 사람은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는 것이 원칙이지만 가지가지 예외가 있다. 화력발전소 운전·정비 업무를 하는 노동자들은 지속적으로 근무하고 있는데다 발전소 업무 특성상 생명안전과도 직결되지만 발전사들은 이들을 정규직화할 계획이 없다. ‘민간의 고도의 전문성을 활용해야 하는 경우’ 정규직으로 전환하지 않아도 된다는 예외규정 때문이다.
직접 고용하는 대신 자회사 조직으로 돌려 정규직으로 바꾸거나 비정규직 기간의 근속기간을 인정해주지 않아 잡음이 생긴 곳도 많다. 노동부에 따르면 지난 5월까지 242개 기관 중 16개 기관(6.6%)이 자회사를 통한 정규직화를 택했다. 이렇게 되면 본사와 자회사 정규직 간의 임금·처우 격차가 그대로 이어질 수 있다고 노동계는 우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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