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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제발···” 10년 싸움 결실 앞둔 삼성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들의 마지막 희망

노도현·이윤주 기자 hyunee@kyunghyang.com

삼성전자와 직업병 피해자들이 이르면 9월 말까지 사과와 보상에 대한 합의를 마칠 것으로 보인다. 2007년 3월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을 얻은 황유미씨가 숨진 지 11년 만에 삼성 직업병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길이 열렸다.

삼성전자와 직업병 피해자 단체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반올림) 양측이 ‘반도체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가 최근 내놓은 2차 조정 제안을 수락하기로 결정했다고 22일 밝혔다. 조정위원회는 지난 18일 양측에 ‘강제조정 방식의 중재’를 제안했다. 2015년 1차 조정에서는 조정위원회가 양측 입장을 조율해 조정안을 만드는 방식을 택했지만 사과와 보상을 놓고 의견이 갈려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이번에는 조정위원회가 양측 주장을 듣고 결론에 해당하는 중재안을 내놓으면 무조건 이를 따르기로 먼저 합의하고 조정절차를 시작하는 일종의 강제조정 방식이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반올림)’와 삼성전자 양측이 백혈병 문제 해결 조정위원회의 2차 중재안을 받아들이면서 삼성전자 직업병 문제를 둘러싼 사과와 보상이 10년만에 마무리될 전망이다.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본사 앞에서 반올림 회원들이 22일 1000일 넘는 농성을 계속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조정위원장인 김지형 전 대법관은 이런 방식을 제안한 이유에 대해 “이 사안은 모든 일하는 사람들의 건강피해와 보상에 관한 문제이며, 당사자 사이에 일정 부분 양보와 타협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반올림과 삼성전자는 중재안을 무조건 수용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사실상 조정위원회에 결론을 백지위임하기로 한 셈이다.

조정위원회는 앞으로 양측 주장을 듣고 이르면 9월 말, 늦어도 10월까지 중재안을 마련해 발표할 방침이다. 중재안에는 반올림 소속 직업병 피해자와 유가족에 대한 보상안, 삼성전자 측의 사과와 반올림 농성 해제, 재발방지 방안 등이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반올림과 삼성전자는 24일 중재 방식에 합의하는 서명식을 하고 논의 절차를 시작한다.

“이제라도 사과했으면”

“그냥 지금 내 몸 이렇게 된 거, 다 사과해줬으면 좋겠어요.”

22일 삼성 직업병 피해자 한혜경씨(40)가 전화기 너머로 힘겹게 말했다. 한씨는 삼성전자가 직업병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의 제안을 무조건 수용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사과’라는 단어를 떠올렸다고 했다.

2012년 7월 26일 국회 의원회관 세미나실에서 열린 삼성 백혈병·직업병 피해자 증언대회에서 피해자 한혜경씨의 어머니인 김시녀씨가 증언 중 울먹이고 있다. 강윤중 기자

2012년 7월 26일 국회 의원회관 세미나실에서 열린 삼성 백혈병·직업병 피해자 증언대회에서 피해자 한혜경씨의 어머니인 김시녀씨가 증언 중 울먹이고 있다. 강윤중 기자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96년 삼성전자 LCD 기흥공장에 들어가 납땜업무를 했다.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생리불순이 생기더니 3년차부터는 아예 생리가 끊겼다. 점점 건강이 나빠져 2001년 회사를 그만뒀다. 2005년에야 뒤늦게 뇌종양이라는 걸 알았다. 수술로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후유증이 컸다.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지도, 말을 제대로 할 수도 없다. “삼성이 정말 나빴어요. 안전교육만 잘해줬어도….” 숨가쁘게 말을 잇던 한씨는 “내 삶이 이렇게 뒤집어진 것이 정말 화난다”면서 “재발을 방지하겠다는 그 말을 잘 지켜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씨의 손발이 돼주는 어머니 김시녀씨(61)는 만감이 교차한다고 했다. 김씨는 “끝이 안 보였던 것이 끝나는구나 생각도 들고, 한편으론 너무 오래 걸려 서럽기도 하다”면서 “거대한 삼성도 어쩔 수 없구나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완전히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 “아직 조정권고안이 나오지 않았으니 기뻐하기는 일러요. 여태 기대했다가 실망한 적이 많아서 지금은 서로 고생했다고 위로만 하는 정도죠.” 모녀의 가장 큰 바람은 ‘책임있는 사과’다. 김씨는 “안전관리를 소홀히 한 것은 꼭 좀 사과했으면 한다”면서 “앞으로는 절대로 혜경이 같은 환자들이 나와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또 피해자 모두에게 ‘배제 없는 보상’을 해주길 바란다고 했다.

10년 넘게 삼성 직업병 문제와 싸워온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은 오랜 싸움의 결실을 앞두고 있지만 역시 말을 아끼는 분위기였다. 혹시나 2차 조정에 방해될까 하는 걱정에서다. 공유정옥 반올림 간사는 “이번이 정말 마지막일 수 있기 때문에 유난히 더 조심하고 있다”면서 “어렵게 걸어온 길인 만큼 잘 마무리됐으면 좋겠다”고만 말했다.

황유미씨의 죽음, 그리고 1022일의 농성

삼성전자 기흥공장에서 일했던 황유미씨가 2007년 3월 급성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이들의 기나긴 싸움이 시작됐다. 분명 일하다 병에 걸려 숨졌는데, 일터에서 생긴 직업병으로 볼 것인지를 놓고 논란이 일어났다. 이듬해 3월 직업병 피해자와 유가족, 노무사, 의사, 변호사들이 모여 반올림을 만들었다. 2011년 6월 황씨가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병에 걸린 이들 중 처음으로 산업재해를 인정받았다.

"이번엔 제발···" 10년 싸움 결실 앞둔 삼성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들의 마지막 희망

2012년 삼성전자는 반올림 측에 대화를 제안했으나 본격적인 협상은 2013년 12월이 돼서야 시작됐다. 결국 2014년 5월 권오현 당시 삼성전자 부회장이 처음으로 백혈병 발병에 대해 사과했다. 하지만 반올림과 삼성은 입장차를 좁히지 못했다. 같은해 9월 몇몇 피해자 유가족들이 ‘삼성직업병가족대책위원회’를 따로 만드는 진통도 겪었다.

그해 12월 김지형 전 대법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가 중재자로 나섰다. 8개월의 논의 끝에 2015년 7월 조정권고안을 마련했다. 삼성전자가 1000억원을 내 직업병 피해자 보상을 위한 공익법인을 세우고, 피해자들에게 보상과 사과를 하라는 내용이었다. 삼성은 공익재단을 만들 수 없다며 권고안을 거부하고 자체 보상위원회를 꾸렸다. 반올림과 일부 피해자들은 이에 반발해 2015년 10월 7일부터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본관 앞에서 천막 농성을 시작했다. 농성은 지난 2일 1000일째를 맞았다.

조정위는 올해 초 삼성전자와 반올림으로부터 ‘합의 의사’가 있음을 확인했고, 지난 18일 ‘2차 조정을 위한 공개 제안서’를 양측에 보냈다. 1차 때는 조정안을 내놓고 양측이 받아들일지 정하게 했지만 이번에는 양측 의견을 듣고 중재안을 만들면 반드시 따르게 했다. 삼성전자가 중재안을 받아들이기로 한 데에는 2월 초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석방된 이재용 부회장의 뜻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 부회장이 석방 뒤 삼성에 대한 국민 신뢰 회복 방안을 고민하면서 10년 넘게 끌어온 이 문제를 사회적 합의로 마무리하는 쪽으로 결론내렸다는 추측이다.

조정위는 이르면 9월 말 피해자 보상과 삼성전자의 사과 방식이 담긴 2차 권고안을 내놓는다. 보상 대상자와 기간, 질환 범위, 보상액 산정방식을 규정한 새로운 보상안도 마련한다. 반올림 농성 해제도 다룬다. 또 반도체 공정의 작업환경을 개선하고 전자산업 하청업체의 안전관리를 도울 방안을 만들어 삼성전자와 정부에 제안할 방침이다. 삼성전자와 반올림은 24일 조정위에서 ‘조정재개 및 중재방식 합의 서명식’을 한다. 10월 안에는 피해자 보상이 끝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