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범씨(27)는 경력 5년차 형틀 목수다. 대기업 건물을 올리는 인천의 작업현장에서 거푸집 만드는 일을 한다. 오전 5시에 현장에 와서 밥을 먹고 7시쯤 일을 시작한다. 요즘같이 35도를 넘나드는 날씨는 그의 표현을 빌리면 “공구리(콘트리트) 치는 애들은 오전에 한 명, 오후에 한 명 쓰러지는 날씨”다.
하지만 현기증이 나도 맘대로 쉴 수가 없다. 300여명이 일하는 건설현장에는 담배를 피우라고 만든 2평짜리 ‘비닐하우스’ 말고는 쉴 곳이 없다. 이씨는 “아침조회 시간에 ‘35도 넘으면 90분 일하고 10분 쉬라’는 원청업체의 지시를 전달받았지만 휴게공간이 없으니 아무도 못 쉰다”고 했다. “몇 시간 일하다 너무 힘들면 다른 사람들 눈을 피해 건설 중인 건물 지하 1층에 5분 정도 앉아있다 올라오는” 것이 휴식의 전부다.
광주광역시의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이준상씨(37) 사정도 비슷하다. 주말에도 일을 하는데 규칙적으로 쉬기는 힘들다. 조립해놓은 그늘막 아래에서 틈틈이 5분씩 숨을 돌릴 뿐이다. “얼음기계가 수천평 공사 부지에 한 개뿐이에요. 얼음물 가지러 가는 데 20분이 걸리니 잘 안 먹게 되죠.”
전국건설노동조합원들이 2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건설현장 폭염 안전규칙 이행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7일 전북 전주에서 60대 노동자가 폭염에 정신을 잃고 추락해 숨졌다. 연일 낮 최고기온이 35도가 넘어 폭염경보가 내려진 상황이었다. 내리쬐는 직사광선, 콘크리트와 철근에서 나오는 열기 때문에 현장에서 일하는 이들이 느끼는 체감온도는 40도가 훌쩍 넘어간다. 당시 노동자들은 안전이 걱정된다며 작업을 중단시켜 달라고 했지만 관리자들이 거부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정부는 지난해 말 산업안전보건 규칙을 고쳐 폭염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쉴 수 있는 권리를 명문화했다. 지난 18일에는 고용노동부가 ‘옥외작업자 건강보호 가이드라인’을 공개했다. 시원하고 깨끗한 물을 규칙적으로 마실 수 있게 제공할 것, 햇볕을 완전히 차단하는 재질로 그늘막을 만들거나 가까운 곳에 시원한 바람이 통하는 그늘진 장소를 마련해 쉬게 할 것, 폭염주의보나 경보가 내려졌을 땐 1시간당 10~15분씩 쉬게 할 것 등이었다.
하지만 현장 노동자들에겐 멀기만 한 얘기다. 우선 가이드라인 자체가 구체적이지 못하다. 이준상씨는 “사업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몇 명 이상일 땐 휴게공간 몇 평을 두라는 식으로 명시하고, 어기면 처벌을 해야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고 했다. “500명 일하는 곳에 10명 먹을 식수대를 설치해도 되는” 것이 지금의 노동부 가이드라인 수준이라는 것이다.
폭염 시 온열질환 사고에 대해서도 타워크레인 붕괴 때처럼 집중적으로 근로감독을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전재희 건설노조 교육선전실장은 “당장 가이드라인을 정비할 수가 없다면 특별근로감독으로 몇 건만이라도 가이드라인 위반 사례를 적발해서 현장이 개선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근본적인 문제는 더위가 아니라 하도급 구조에 있다. 건설노조는 매년 되풀이되는 폭염 속 산재사고를 줄이려면 현장에 뿌리 깊이 박힌 원·하청과 다단계 하도급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금같은 하도급 구조에서는 하청업체들이 ‘공기(공사기한)’를 맞춰야 한다는 압박 때문에 현장 노동자들에게 충분한 휴게시간을 줄 수가 없다.
이영철 건설노조 부위원장은 “하루 물량을 끝내지 않으면 일당을 못 받는 임금체계 속에서는 노동부의 권고가 제대로 받아들여질 리 없다”며 “다단계 하도급 관행을 없애고, 독일처럼 장마·폭염 작업 때 수당을 추가 지급하는 ‘악천후 수당’을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건설현장 찾은 노동부 차관 “공사 연기 사유에 폭염도 포함토록”
2018.7.27 남지원 기자
연일 살인적인 무더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고용노동부가 ‘폭염’을 공사기한 연기 사유로 포함시킬 수 있도록 관련 규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성기 고용노동부 차관은 27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주상복합빌딩 신축공사장을 방문해 열사병 예방 수칙을 준수하고 있는지 살피고 현장 노동자들의 의견을 들었다. 이 차관은 “촉박한 공기로 인해 충분한 휴식 등 기본수칙이 지켜지지 않는 점을 감안해 공사 연기 사유에 폭염도 포함될 수 있도록 관련 규정 개정을 관계부처와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건설사는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태풍이나 홍수, 지진, 화재, 전염병 등 불가항력적 이유가 있을 때는 산재를 막기 위해 발주청에 ‘공사기간 연기 요청’을 할 수 있고, 발주처는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이를 들어줘야 한다. 하지만 폭염은 대다수 발주기관에서 연기 사유로 인정되지 않고 있다.
이 차관은 “고용노동부는 폭염에 취약한 건설현장에 대해 자율점검 및 특별점검을 실시해 열사병 예방 기본수칙을 위반한 사업장에 대해서는 작업중지 등 강력히 조치할 것”이라고 밝혔다.
건설현장에서는 공사 지연에 따른 지체상금 등 비용을 줄이려다 보니 폭염 속에서도 노동자의 충분한 휴식이 잘 보장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옥외 노동자에게 ‘아이스 조끼’ 등 보냉 장비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노동부는 “건설현장에서 폭염에 직접 노출되는 옥외 노동자의 건강보호를 위해 보냉 장구를 산업안전보건관리비로 구입·지급하도록 현장지도를 강화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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