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이 투자한 기업에서 ‘갑질’이나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킨 사건이 일어나면 임원 해임이나 주식 매각 등을 통해 개선을 요구할 수 있게 된다. 주주권 행사 등을 통한 경영 참여의 길이 열린 것이다.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는 30일 ‘수탁자 책임에 관한 원칙’(스튜어드십 코드)을 이같이 도입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기관투자가가 자금 주인인 국민의 이익을 위해 주주활동을 ‘집사’처럼 충실히 할 수 있도록 하는 행동지침이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는 향후 투자하는 기업에 대해 매년 1~2차례 환경·사회·기업지배구조 등의경영실태를 점검하고 문제가 있으면 국민연금의 입장을 밝히거나 경영진 면담을 요구하고, 주식 매각 등 주주권을 행사키로 했다. 임원 해임이나 정관 변경 등으로 경영에 참여할지는 논쟁이 있었으나, 갑질 사건처럼 큰 물의를 일으킨 기업에 한해 기금운용위 검토를 거쳐 허용하도록 했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경영 참여 등 핵심 쟁점은 기금운용위원들이 조금씩 양보하면서 합의를 이뤘다”고 설명했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이날부터 발효되지만 준비 기간이 필요해 실제로는 내년 하반기부터 본격 적용될 예정이다. 국민연금은 올 하반기에는 이익을 쌓아두고 주주들에게 제대로 배당하지 않는 일부 기업들에 대해 합리적 배당정책을 수립하도록 요구할 예정이다. 내년부터는 투자 기업 중 횡령과 배임, 부당지원행위, 경영진의 사익 편취 문제가 있는 업체들을 ‘중점관리사안’(블랙리스트)으로 정하고 주주권 행사에 나서기로 했다.
제도는 이제 시작됐지만, 정착되는 것을 지켜본 뒤 보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정용건 ‘공적연금강화 국민행동’ 위원장은 “제대로 기업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아직 보완할 부분이 많다”며 “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경우가 현재보다 확대돼야 하고, 새 제도를 제대로 운용할 수 있도록 국민연금 내 전문 인력도 보강돼야 한다”고 말했다.
적폐기업에 임원 해임 요구 등 ‘견제’ “주주 가치 훼손 이례적 상황에만 행사”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합병할 당시, 삼성물산의 1대 주주였던 국민연금은 합병이 기금운용에 불리했음에도 청와대 지시를 받아 이를 찬성했다. 이를 통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수조원에 달하는 경영권 승계 비용을 절감했지만, 국민들의 노후 자금은 약 3000억원대의 피해를 입었다. 정치·경제권력에 휘둘려 사회적 책임을 무시했던 국민연금의 문제가 드러난 순간이었다.
30일 국민연금이 도입한 ‘스튜어드십 코드’(수탁자 책임에 관한 원칙)는 이 같은 과거 사건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했다. 국민들이 맡긴 자금이 600조원대에 이르지만 정작 이를 운용하는 국민연금은 주주총회에서 대기업의 ‘거수기’ 노릇을 하거나, 정권에 휘둘려 사회에 악영향을 끼칠 때가 있었다. 스튜어드십 코드가 도입된다면 국민연금은 향후 기업에 투자할 때 재무 상황뿐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지도 평가하게 되며, 문제가 있으면 기업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게 된다.
특히 이날 결정된 최종안에서는 국민연금이 기업경영에 참여하는 수준까지 주주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해 스튜어드십 코드의 효과를 높였다. 현행법은 임원의 선임·해임이나 직무정지, 정관의 변경, 회사 해산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행위를 경영 참여로 본다. 진보적 성향의 시민사회단체들은 “경영 참여가 가능해야 제대로 기업을 견제할 수 있다”고 강조했으나, 정부는 “경영 참여를 나중에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이 때문에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은 한 차례 연기되는 진통을 겪기도 했다.
정부가 기업경영 참여를 허용하면서도 특별한 경우로 제한한 이유는 “자칫 경영 참여로 인해 연금 수익률이 떨어질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현행법은 상장사 지분을 5%, 10% 이상 가진 기관투자가가 경영 참여를 하게 되면 지분 변동을 5일 이내 공시하도록 하는데, 이는 투자 전략을 노출시켜 수익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기금운용위의 일차적 목적은 수익성”이라며 “기금운용위에서 수익률을 떨어뜨리면서까지 경영에 참여하는 일은 극히 이례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연금의 의결권을 자산운용사에 일부 위임하는 안은 반대가 많았으나 허용하는 쪽으로 결정했다. 앞서 재계에선 “국민연금의 영향이 너무나 커 의결권을 일부 위임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시민사회단체들은 “자산운용사들이 잠재적 고객인 대기업의 눈치를 보는 만큼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 될 수 있다”고 반대했다.
정부는 의결권 행사를 위임하되 이해상충 등 문제를 피할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적용할 예정이다. 또 자산운용사의 의결권 행사에 문제가 있을 경우 의결권을 회수하기로 했다.
노동계와 재계에서는 이날 합의된 결과에 대해 ‘일부 만족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다만 재계 일각에서는 여전히 경영 간섭을 우려하며 제도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경영자총연합회 관계자는 “스튜어드십 코드는 그 자체로 기업에 부담이었지만, 처음에 우려했던 것보다 안정된 형태로 도입돼 그나마 안도하고 있다”며 “시행하면서 문제가 나타나면 보완 혹은 적용해제를 요구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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