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태풍으로 연간 가장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은 것은 1936년, 희생자는 1104명이었다. 폭염으로 인한 인명 피해는? 무려 3384명(1994년)이다. 하지만 ‘소리없는 살인자’ 폭염은 아직도 자연재해법상 재난이 아니다.
올해 기록적인 더위 속에 폭염도 재난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려면 재난의 기준이 될 폭염의 규정부터 세분화해 정교하게 가다듬어야 한다. 기상청은 2020년 시행을 목표로 새로운 ‘폭염 영향예보 체계’를 준비하고 있다고 2일 밝혔다. 최고기온만이 아니라 일사량과 습도의 변수를 추가하고, 폭염이 미칠 ‘사회경제적 영향’을 알려주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영향정보 단계는 ‘관심, 주의보, 경보, 경보심각’ 순이다. 31도가 사흘 이상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면 ‘관심’, 33도가 넘으면 ‘주의보’, 35도 이상이면 ‘경보’, 38도 이상일 때에는 ‘경보 심각’ 단계로 시범 운영하고 있다.
현재 기상청의 폭염특보는 두 단계로 돼 있다. 최고기온이 33도 이상인 날이 이틀 이상 지속될 것으로 예상될 때 폭염주의보, 35도 이상이 이틀 이상 지속될 것 같으면 폭염경보를 발령한다. 하지만 올 여름 전국 대부분 지역에 날마다 경보가 발령되면서 정보 가치가 없어졌다. 어제의 더위와 오늘의 더위가 무엇이 다른지 시민들은 알 도리가 없다. 2017년 온도와 습도 등을 고려해 5단계로 세부 대응요령을 알려주는 ‘더위체감지수’를 만들었지만 많이 쓰이지 않는다. 열사병예방지수, 도시고온건강지수도 있으나 방재 등 특정분야에만 사용된다.
인도에서는 여름철 평년 최고기온이 40도 이상 올라가는 ‘더위 취약지역’을 정해 기온에 따라 ‘열파(heat wave)의 영향이 있다’ ‘중(中) 정도의 열파’ ‘엄중한 열파’로 구분해 알린다. 중국은 최고기온과 상대습도, 폭염 지속기간을 고려해 3단계(輕·中·重)로 구분하고 있다. 영국은 시민들에게 5단계에 걸쳐 대비신호를 보낸다. 스페인과 프랑스처럼 지역에 따라 다른 기준을 설정한 나라도 있다.
폭염을 재난으로 지정해 국가가 예방대책을 세우고 정책적 지원을 하려면 폭염 기준을 세분화해야 한다. 여름철 맑은 날 12~14시 사이에 일사량은 1000w, 지면의 방출열량을 합하면 2000W 수준이다. 김해동 계명대 지구환경학과 교수는 “여름철 야외 노동자는 전기장판 20개를 감싸고 일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최고기온이 폭염특보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현재로선 작업을 중단시킬 구체적 근거가 없다. 김 교수는 “재난 수준의 폭염이 예상되면 작업을 중단하거나 일을 쉴 수 있도록 법령을 정비해야 하는데, 이를 위한 사전 작업이 바로 폭염 기준의 재정립”이라고 말했다.
또한 폭염의 영향은 각 지역의 지리, 사회, 경제 환경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서울 강남의 30대 회사원과 충북 농촌의 70대 노인이 겪는 폭염의 영향은 다를 수 밖에 없다. 채여라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온도 위주의 지금 같은 폭염특보는 특정 지역, 특정 계층 사람들에게는 잘못된 정보가 될 수밖에 없다”면서 “폭염에 취약한 지역이나 계층을 대상으로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환경부가 평균기온, 의료기관 등 사회인프라, 인구비율 등을 고려한 ‘폭염취약성지수’를 만들어 지난 1일 공개한 것도 이런 노력의 일환이지만 아직은 지표가 단순하다는 한계가 있다.
광역 정보를 제공하는 기상청과, 취약계층 정보를 잘 알고 정책을 실제로 집행하는 지자체의 협력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한다. 현재 서울의 경우 기상청 자동기상관측장비(AWS)가 대략 25㎢에 하나 꼴로 설치돼 있다. 자연재해가 많은 일본 도쿄도의 경우 지자체 차원에서 약 6㎢ 단위로 관측망을 구축해놨다. 기상청이 새 폭염 영향예보 체계를 구축한다 해도 결국 ‘활용’은 재해대책과 어떻게 연동되느냐에 달렸다. 기상청 영향예보추진팀 관계자는 “기상청 특보기준에 따라 재해대책 시나리오를 만드는 행정안전부, 지자체들과 함께 활용방안을 논의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냉·난방비 부담, 빈곤가구 늘리고 빈부격차 확대시켜
서민들의 냉·난방비 부담이 빈곤가구를 늘리고, 빈부격차도 악화시킨다는 분석이 나왔다.
2일 에너지경제연구원의 ‘에너지 소비지출과 불평등 연구’ 보고서를 보면, 냉·난방비 부담 때문에 빈곤가구로 떨어지는 가구가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번 돈에서 세금 등을 빼고 남은 돈이 생계에 필요한 최저 수준보다 적은 가구를 빈곤가구로 규정한다. 2015년 빈곤가구는 전체 가구의 14.9%인 293만 가구였다. 에너지비용을 빼고 남은 소득으로 분류하면 빈곤가구는 15.2%인 297만 가구로 늘어난다. 4만 가구 가량이 냉·난방비 지출로 빈곤가구 경계선 위아래를 오가는 것이다.
에너지비용은 빈부격차도 벌려놓는다. 연구원이 2016년 가구소득으로 계산한 ‘지니계수’는 0.346이었다. 그런데 에너지 지출을 뺀 가구 소득으로 계산한 지니계수는 0.353으로 높아졌다. 지니계수는 소득불평등을 나타내는 지표다. 1에 가까울수록 빈부격차가 크다는 뜻이다.
에너지는 소득에 정비례하게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빈부에 상관없이 일정량 이상 사용할 수밖에 없는 ‘필수재’이기 때문에 소득불평등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연구원은 설명했다. 2016년 기준으로 소득수준 1분위 가구와 5분위 가구의 경상소득은 약 8배 차이가 났지만, 연료비 차이는 1.5배도 되지 않았다. 심지어 저소득층은 생활환경이 열악하기 때문에 일정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에너지에 더 많은 돈을 써야 할 때도 있다. 전력 소비효율이 낮은 저렴한 제품을 살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에너지비용 부담으로 연결된다. 게다가 저소득층 가운데에는 홀로 사는 노인 등 1인 가구가 많다. 상품이 다양하지 않아서 3~4인용 전기제품을 써야 한다면 그 또한 에너지비용 ‘과다지출’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보고서를 쓴 박광수 선임연구위원은 “에너지비용을 많이 지출하게 되면 저소득층의 가구 소득을 크게 감소시키는 효과를 낼 수 있고 결국 빈곤과 불평등에 악영향을 주게 된다”고 말했다. 박 위원은 “현재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시행하는 에너지 지원정책은 이런 부정적 영향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며 “지원의 수준과 대상을 더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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