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명의료결정법 시행 8개월 만에, 무의미한 연명의료 대신 ‘존엄한 죽음’을 선택한 환자가 2만명을 넘어섰다.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임종 문화가 점차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윤리적 기준을 확립하고 보완해가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9일 보건복지부와 국가생명윤리정책원에 따르면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된 지난 2월부터 이달 3일까지 회복 가능성이 없어 연명의료를 시도하지 않거나 중단한 환자는 2만742명에 달했다. 연명의료는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등 4가지 의료행위를 말한다. ‘유보’는 처음부터 연명의료를 하지 않는 것, ‘중단’은 받고 있던 연명의료를 그만두는 것이다. 성별로 보면 남성이 1만2544명이었고 여성이 8198명이었다.
법에 따라 ‘말기 환자’들은 임종을 앞두고 연명의료계획서를 쓸 수 있으며, 건강한 사람이라도 미리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써서 만일의 경우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는 뜻을 기록으로 남겨둘 수 있다. 8일 기준 사전의향서를 작성한 사람은 6만203명,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한 말기환자나 임종과정 환자는 1만343명이다.
하지만 실제 연명의료를 유보·중단한 사람 중에 투병 중 계획서를 쓴 사람은 6836명(33.0%), 사전의향서를 써뒀다가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이른 사람은 154명(0.7%)에 그쳤다. 3분의 2는 스스로 선택하기보다 가족의 뜻에 따라 연명의료를 중단했다. 문서를 남기지 못한 채 임종기를 맞아 가족의 진술이나 합의로 결정한 것이다. 가족 2명 이상이 환자가 평소 연명의료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일치하게 진술한 경우가 6224명(30.0%), 환자의 평소 의향이 어려워 가족 전원합의로 결정한 경우가 7528명(36.3%)이었다.
한 해 동안 전국에서 병이나 사고, 자연사 등으로 숨지는 사망자 수는 28만명 정도다. 법이 시행된 지 1년도 되지 않아 2만명 이상이 연명의료 중단을 택한 것은 병실에서 생존을 이어가는 대신 스스로의 결정에 따라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이들이 크게 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다. 윤영호 서울대 의대 교수는 “가족들이 결정하는 비율이 높기 때문에 의료기관들은 환자가 미리 연명의료 의향을 밝혀둘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면서 “연명의료 중단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호스피스 시설을 늘려 병원이 아닌 곳에서 편안하게 임종을 맞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법에 따라 일정 규모 이상의 의료기관들은 ‘의료기관윤리위원회’를 설치해야 한다. 정부가 지정한 기관에서 의향서나 계획서를 썼더라도 실제 연명의료를 유보·중단하려면 윤리위가 있는 병원에서 사망이 임박했다는 판단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상급종합병원은 42곳 모두 100% 윤리위를 설치했지만, 종합병원은 302곳 중 89곳(29.5%), 병원급은 1467곳 중 9곳(0.6%), 요양병원은 1526곳 중 22곳(1.4%)만 윤리위를 갖춘 것으로 조사됐다. 복지부는 병원들 여건을 감안해 지난 5월 전국 8개 의료기관 윤리위를 ‘공용윤리위’로 지정했다.
연명의료결정법이 ‘환자가족’ 범위를 ‘배우자와 모든 직계 존·비속’으로 규정한 점을 지적하는 이들도 있다. 가족 범위가 넓어 수십 명이 동의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국회는 가족 범위를 줄이는 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윤태호 복지부 공공보건정책관은 “제도 시행 초기인 만큼, 여러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 법을 보완하고 의료기관 여건을 개선해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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