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하고 돈 벌기

[일자리 공정성 갈등]“취업전쟁 이겼는데”…‘정규직 전환’ 불편한 시험만능사회

송윤경·김상범 기자 kyung@kyunghyang.com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직후 선언한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정책이 정규직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특히 이제 막 정규직 노동자가 된 청년세대의 저항이 거세다. 외환위기 이후 20년 동안 정규직·비정규직 간 격차가 굳어지면서 정규직이라는 것은 고용형태를 넘어 일종의 ‘정체성’과 ‘신분’이 돼버렸다. 시험만능주의와 일자리를 둘러싼 극한경쟁이 겹쳐지면서 생겨난 현상이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바꾸겠다는 정책을 놓고 최근 인천국제공항공사에서 터져나온 ‘정규직들의 반란’은 입사시험이 ‘인생 스펙’이 되는 한국 사회의 현실을 보여준다는 분석이 많다.

지난달 23일 열린 ‘인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방안 공청회’.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비정규직 9000여명 중 최소 3221명을 공사가 직접고용해야 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그러자 공사 정규직 300여명의 야유와 고함이 터져나왔다. 본사 정규직 1200여명 가운데 4분의 1이 공청회장을 메운 것이다. 이들에게 입사시험을 치지 않은 비정규직의 ‘본사 정규직화’는 넘어서는 안될 선이다. 표면상으로는 ‘본사·자회사’가 전선이지만 실제로는 시험을 보지 않은 비정규직이 공채 정규직과 대등한 존재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5월12일 인천국제공항공사를 찾아 노동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이런 갈등은 인천공항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다. 중등교사 임용시험 준비생 3700여명이 가입된 온라인 카페 ‘전국 중등 예비교사들의 외침’ 회원들은 지난 8월 기간제 교사를 정규직으로 전환해선 안된다며 집회를 했다. 서울 지하철을 운영하는 서울교통공사의 청년 정규직들도 스크린도어와 철도 정비, 역무, 구내식당 업무를 맡고 있는 무기계약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에 집단 반발했다.

논리는 단순하다. ‘시험’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정규직이 되는 것은 ‘불공정하다’는 것이다. 인천공항에서는 비정규직들을 향해 “경쟁을 거부하는 무임승차자”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중등 예비교사 모임은 정규직이 되고 싶어 하는 기간제 교사들을 “교직계의 정유라”라고까지 표현했다.

청년 정규직들의 저항에 대해 학자들은 공통적으로 보상심리와 불안감을 지적한다. 신경정신과 의사인 하지현 건국대 교수는 “한국 사회는 정규직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과도한 에너지와 노력을 기울여 경쟁을 치르게 만들었다”며 “그렇기 때문에 울타리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정규직이라는 정체성을) 자신이 노력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인천공항 정규직들의 ‘무임승차론’에 대한 여론은 곱지 않다. 채용된 지 얼마 안된 젊은 정규직들이 공항에서 십여년간 일한 이들에게 ‘무임승차’ 딱지를 붙이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청년 정규직들 사이에선 극심한 경쟁 속에서 시험에 통과한 자신들은 ‘공정한’ 경쟁을 치러 이겼으니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심리가 팽배하다. 하 교수는 “특히 청년 정규직들은 기성세대에 비해 삶에 대한 불안이 더 크기 때문에 ‘저들이 올라오면 내가 내려가게 될 것’이라는 공포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노골적인 이해관계 다툼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노동사회학을 연구해온 한 학자는 청년 정규직들의 심리를 ‘사다리 걷어차기’에 빗댔다. 익명을 요구한 이 학자는 “제일 늦게 사다리에 오른 이가 뒷사람을 걷어차는 심리”라며 “어렵게 얻은 기득권을 침해받지 않으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근본적으로 한국인들의 정체성 구조를 성찰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찬호 성공회대 교수는 “한국은 자기가 누구인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게 아니라 점수로 등수를 매겨 인식하게끔 가르쳐왔다”고 지적했다. “시험을 보고 자기보다 점수가 낮은 사람이 있어야만 자존감이 형성되도록 배워왔으며, 정규직이 상위인 서열구조는 비정규직이 있어야만 존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규직 취업문이 극한경쟁 구도에 놓이면 놓일수록, 정규직이 된 이들은 비정규직 차별을 당연시할 가능성이 높다. 시험점수로 인간의 ‘급’을 나누는 한국 사회의 고질병과 외환위기 이후 켜켜이 쌓여온 삶의 불안이 ‘공정이라는 이름의 차별’을 만들어낸 셈이다. 하지만 비뚤어진 능력주의는 청년 정규직들이 내세우는 ‘공정’과는 거리가 멀다. 김 교수는 “같은 일을 하는 비정규직이 정규직 절반 이하 임금을 받거나 혹은 현저하게 적은 임금과 고용불안으로 착취당하는 것은 그렇다면 공정한 것이냐”고 되물었다.

인천공항 노사, 직접고용·자회사 흡수 대립 속 ‘돌발 변수’


문재인 대통령이 ‘비정규직 제로’를 처음으로 선언한 인천국제공항공사. 이후 반년이 지났지만 공사와 비정규직노조는 ‘직접고용’과 ‘자회사 고용’ 방안을 두고 여전히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그 와중에 정규직들의 반발이라는 변수가 등장했다. 간접고용 틀을 최대한 유지하려는 사측, 비정규직 끌어안기에 반대하고 나선 정규직들. 이 갈등을 어떻게 해결해 나가느냐가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정책의 성공 여부를 가늠할 것으로 보인다.

인천공항은 2001년 개항 당시부터 네덜란드 스키폴공항 등을 본뜬 대규모 아웃소싱 시스템을 구축했다. 지난 5월 문 대통령이 공사를 찾아 비정규직을 없애겠다고 선언했을 당시 인천공항에 간접고용된 비정규직은 6000여명이었다. 제2여객터미널 개장을 앞둔 지금은 9900여명에 이른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구조다. 정규직 숫자는 약 1200명에 불과하다. 근무지도 분리돼 있다. 공항 방문객들이 터미널에서 마주치는 직원들은 거의 모두 외주업체 소속이다. 정규직들은 기획, 관리, 마케팅 등의 사무직군으로 별도의 통합청사에서 근무한다.

[일자리 공정성 갈등]“취업전쟁 이겼는데”…‘정규직 전환’ 불편한 시험만능사회

정일영 사장이 “연내 1만명을 정규직화하겠다”고 밝힌 뒤, 공사와 비정규직노조(공공운수노조 인천공항지역지부), 전문가들로 이뤄진 노·사·전문가협의회가 지난 8월부터 정규직화 방안을 논의해 왔다. 핵심 쟁점은 공사가 직접고용할 것인지, 자회사를 세워 흡수할 것인지다. 사측은 인건비와 조직관리 부담을 들며 500~800명만 직접고용하고 나머지는 별도 법인에 들어가게 하는 안을 내놓았다. 노조는 문재인 정부의 노동존중 기조와 고용불안 해소라는 취지에 비춰봐도 직접고용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난달 말 공사가 정규직화 규모에 대해 연구용역을 맡긴 결과가 나왔다. 한국능률협회컨설팅이 밝힌 직접고용 대상은 공항소방대와 전력계통시설유지관리 등 8개 용역 854명에 불과하다. 전환 대상인 64개 업무 9947명의 9% 수준이다. 공사가 그동안 노·사·전협의회에서 주장해온 방안과 거의 일치한다. 반면 한국노동사회연구소와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는 직접고용 대상을 최소 3221명에서 최대 9384명까지로 보고 네 가지 방안을 내놨다. 이 가운데 공사가 5650명을 직접고용하는 3안이 가장 적합하다고 봤다. 한노사연은 보고서에서 “보안경비·검색 업무를 맡는 3734명은 별도의 보안방재공사를 세워 고용하고, 나머지 업무는 공사가 직접고용해야 한다”고 썼다.

정규직들의 거센 반발이 터져나오자 공공운수노조는 “직접고용된 사람들과 임금 등 처우가 같다는 조건하에 별도회사(자회사) 안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한발 물러섰다. 이를 두고 노·사·전협의회는 지난주 본회의와 실무회의를 연달아 열었지만, 공사 측이 정규직 저항을 등에 업고 “직접고용 대상자는 반드시 경쟁채용을 거쳐야 한다”는 주장을 고수해 교착 상태에 빠졌다. 인천공항 정규직 노조의 상급단체인 한국노총 공공노련은 “정부가 명확한 원칙과 기준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고 정부에 책임을 돌렸다. 하지만 애초 정부 가이드라인은 ‘청년선호 일자리’에 한해서만 경쟁채용을 도입하도록 하고 있다. 공공운수노조 관계자는 “10년간 일해도 연봉 3000만원인 일자리가 청년선호 일자리라는 것은 억지스럽다”라고 지적했다.

노동부에 따르면 공공기관의 89%에 기간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바꿀 ‘전환심의위원회’가 구성됐다. 190곳에는 노·사·전협의회가 만들어져, 파견·용역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을 논의 중이다. 하지만 인천공항과 같은 갈등이 다른 공공부문 사업장에서도 반복될 조짐이다. 서울교통공사에서는 낮은 연차의 직원들이 중심이 돼 ‘합리적 정규직 전환을 위한 연대모임’을 꾸리고 정부 방침을 ‘특혜성 정규직화’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 밑에는 그동안 누려온 ‘파이’를 나눠 갖는 것에 대한 거부감, 숫자가 더 많은 비정규직들이 교섭대표노조 지위를 차지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깔려 있다. 권혁 부산대 로스쿨 교수는 “비정규직이 소수인 기관에선 순탄하게 정규직 전환이 이뤄지는 반면에 정규직이 외려 소수인 인천공항 같은 곳에서는 근로조건이나 복리후생 후퇴를 우려한 반발이 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