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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혼날 건 혼나야···뚜벅뚜벅 제 역할 할 것” MBC 뉴스데스크 박성호 앵커·한학수 'PD수첩' 새 진행자

매일 아침 출근길 눈은 조간신문을, 귀는 라디오 뉴스를 향한다. 오전 9시 편집회의로 일과를 시작한다.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때도 포털사이트에서 무엇이 화제인지 유심히 본다. 오후 2시 회의에서 뉴스 아이템이 잡히면 앵커멘트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오후 4시, 1시간 가량 분장을 받는다. 5시부터 7시30분까지는 앵커멘트 쓰는 데 집중한다. 8시 뉴스가 시작되면 시선을 카메라에 고정하고 종일 준비한 것을 쏟아낸다. 퇴근해 뉴스를 모니터하다 보면 자정이 된다. 박성호 MBC ‘뉴스데스크’ 앵커(46)의 하루다.

4일 서울 상암동 MBC보도국에서 박성호 MBC 뉴스데스크 앵커. 이준헌 기자


4일 서울 상암동 MBC사옥 보도국에서 만난 박 앵커는 “눈 뜨고 눈 감기 전까지 뉴스 생각 뿐”이라고 했다. “메인뉴스 앵커는 밤 시간대 집중해야하기 때문에 보통 오후 회의부터 참석한다. 그런데 앵커가 아침 회의에 안 들어가면 아이템 논의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모르고 중간에 끼어드는 셈이 되더라. 기사 발제 단계에서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몸은 힘들지만 일하기는 훨씬 좋다.”

2012년 파업 때 해직됐다가 5년여 만에 복직한 그는 이제 MBC 뉴스의 신뢰를 회복하는 최전선에 서 있다. 지난해 12월 8일 복직해, 26일부터 손정은 아나운서와 평일 <뉴스데스크>를 진행하고 있다. 동료들끼리 “이런 날이 오네”라는 말을 지겹게 주고받을 정도로 복직 전후 삶은 너무나 다르다. 한 때는 회사 로비에도 들어갈 수 없어서 동료들이 집회를 하는 모습을 회전문 밖에서 바라봐야 했다. 박 앵커는 “회사 안을 마음대로 걸어다니다 보면 자유의 몸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이 때 변화를 실감한다”고 했다.

4일 서울 상암동 MBC보도국에서 박성호 MBC 뉴스데스크 앵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4일 서울 상암동 MBC보도국에서 박성호 MBC 뉴스데스크 앵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회사를 떠나 있는 동안에 한국과 영국의 선거보도를 분석한 논문으로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우리는 기계적 중립이냐 아니냐를 놓고서만 얘기하는데, 공정보도는 균형과 중립을 넘어 사회적으로 다양한 의견을 반영하고 맥락을 충분히 설명하고 비판적으로 질문하는 것까지 포괄한다”는 것이 연구를 통해 내린 결론이라고 말했다.

까마득한 후배들이 1년여 전 촛불집회 때 ‘숨어서’ 중계방송을 하는 모습을 보고 먹먹한 마음에 발을 떼지 못한 적도 있었다. 스태프들이 철수하고 난 뒤 후배들이 숨어서 방송하던 건물에 올라가봤을 때 “마음이 굉장히 추웠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는 앵커를 맡은 뒤 첫 방송에서 지난 5년 MBC의 불공정한 보도들에 대해 사과했다. 하지만 되돌아온 미디어 현장이 녹록지는 않다. 시민들의 응원을 받던 해직기자 시절과 달리, 이제는 카메라 앞에서 ‘진짜 승부’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박 앵커는 지난 정권 때의 보도를 사과하고 일주일만에 다시 시청자들 앞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전직 인턴을 시민인 양 인터뷰한 리포트 때문이었다. ‘제천 소방관 오보’를 비롯해, 새출발한 뉴스데스크에는 사과할 일들이 이어졌다. 박 앵커는 “아프고 참담하다”고 했다. “사과하는 것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있어서는 안 될 일들이 터져나와 많이 부끄럽다. 정확하고 공정한 보도로 신뢰를 얻어야겠지만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과를 주저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고 느꼈다. 혼날 건 혼나야 한다. 이번 일로 기본이 많이 무너져있다는 점도 확인했다.”

‘달라지겠습니다’는 선언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지를 돌아본다고 했다. ‘좋은 앵커’란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은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신뢰를 얻는 건 어렵지만 잃는 건 한순간이라는 것은 안다. “사장이 바뀌고 기자들이 바뀌었다 해서 시청자들이 MBC를 봐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긴 호흡으로 진득하게, 뚜벅뚜벅 제 역할을 다하자고 다짐한다.”


'PD수첩' 진행자로 돌아온 한학수 PD "강박감 내려놓고 안타 쳐나갈 것"

<PD수첩> 진행자로 복귀하는 한학수 PD가 2일 서울 상암동 MBC사옥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PD수첩> 진행자로 복귀하는 한학수 PD가 2일 서울 상암동 MBC사옥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MBC <PD수첩>은 한학수 PD(49)의 30대를 상징한다. 2005년 말 서른여섯 살 청년은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논문 조작 의혹을 보도해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었다. 불행히도 그의 40대는 ‘귀양’의 세월이었다. 논문 조작 보도 이후 <MBC스페셜> <W> 등을 연출했던 그는 2010년 김재철 전 사장 시절 파업에 참여한 뒤 안광한, 김장겸 전 사장 때까지 비제작부서를 전전했다.

오는 9일 연출자이자 진행자로 <PD수첩>에 돌아오기까지 12년이 걸렸다. 홍보 영상에는 ‘오직 시청자의 편에 서서 MC로 돌아온 한학수 PD’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식상해보이지만 그에겐 특별한 의미가 있다. 지난 2일 서울 상암동 MBC사옥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실력이 모자라서 제대로 비판하지 못한 적은 많지만 압력 때문에 피해간 적은 없다. 시청자만을 두려워하는 방송, 그것은 여전히 PD수첩의 신념이다.’ <PD수첩> 15주년 특집 방송에서 최승호 PD의 클로징 멘트였다. 황우석 사태 제보자는 이 멘트를 듣고 제보를 결심하게 됐다고 한다. 내 인생을 바꾼 멘트다. 시청자만을 위한다는 것은 방송의 본질이다.”

지난해 12월 파업은 끝났고 해직 5년 만에 돌아온 강지웅 시사교양1부장을 중심으로 <PD수첩> ‘드림팀’을 꾸렸다. 언젠가 꼭 이 프로그램으로 돌아가겠다고 생각했지만 진행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고 한 PD는 말했다. “<PD수첩>이 무엇을 지향하는가, 어떻게 변할 것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줄 인물이 필요했던 것 같다. 황우석 보도와 그 뒤 탄압받았던 이미지가 중첩되면서 한학수가 ‘진실’을 잘 전달할 수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MBC ‘PD수첩’ 홍보 동영상.

MBC ‘PD수첩’ 홍보 동영상.

2010년 경인지사를 시작으로 신사업개발센터, 송출주조정실, 디지털포맷개발센터 등에서 40대를 보냈다. 그는 감옥과도 같던 송출주조정실 시절을 떠올렸다. “방송 잘 나가나 관리하는 게 송출주조정실 업무다. 다른 사람들은 망가진 뉴스를 안 보면 그만인데, 그걸 처음부터 끝까지 봐야하는 것이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너무 오랜만에 돌아온 탓에 올해 중학교에 가는 작은 아이는 아빠가 TV에 나오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아빠가 방송에 나올 거라고 하니 고개를 갸우뚱했다고 한다.

다큐멘터리로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다는 바람 하나로 연출자가 됐다. 입사 20주년을 맞은 2017년은 잊을 수 없는 한 해였다. 광장의 촛불이 대통령을 물러나게 했다. <PD수첩>이 가장 먼저 제작거부를 선언하며 파업에 앞장섰다. 김장겸 전 사장이 물러나고 그 자리에 옛 동료인 최승호 사장이 취임했다. 한 PD는 “이런 드라마가 또 있을까 싶다”고 했다.

<PD수첩>에 몸담은 시간은 3년 뿐이다. 그런데도 이 프로그램은 그의 인생을 규정한다. 그는 “<MBC스페셜-아프리카의 눈물> 촬영하면서 고생했지만 <PD수첩>의 한학수가 더 유명하다. 떠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며 웃었다.

<PD수첩> 진행자로 복귀하는 한학수 PD가 2일 서울 상암동 MBC사옥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PD수첩> 진행자로 복귀하는 한학수 PD가 2일 서울 상암동 MBC사옥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그가 진행하는 <PD수첩> 첫 회는 세월호 참사의 축소판이라고 불리는 ‘스텔라 데이지호 침몰 사고’를 다룬다. 실종자를 구조하기 위해 국가가 무엇을 했는지 묻는다. 그 다음주 방송은 국정원이 한국 민주주의를 어떻게 후퇴시켰는지 돌아본다. 한 PD는 “MBC가 다시 한 번 일어설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말했다. “첫술에 절대 배부르지 않을 거라고 본다. 생각보다 우리가 약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달, 두 달 지나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야성이 드러날 거라고 본다. 너무 조급하게 가지 않게, 천천히 가려고 한다.”

50대의 키워드는 ‘희망’이었으면 하는 소박하고도 절실한 바람이 있다. 그는 “지난 몇년간 제작 일선에서 배제되고 나서야 내 인생에서 프로그램이 얼마나 소중한지, 절박한지를 느꼈다. 취재와 보도를 하지 못했을 때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요즘은 하루 12시간씩 일해도 스트레스 많이 안 받고 그저 즐겁다. 강박감을 조금 내려놓고 하나하나 안타를 쳐나가려고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