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도 하지 않았었고 결정에 대해 조금도 비판하고 싶지 않다. 문재인 정부를 탓할 필요도 없다.”
2015년 민중총궐기 집회를 주도한 혐의로 징역3년을 선고 받아 복역 중인 한상균 전 민주노총 위원장(56)이 옥중에서 쓴 편지에서 문재인 정부 첫 특별사면에서 자신이 빠진 데 대한 생각을 이같이 전했다. 그러면서 “노동존중 세상을 노동자의 단결된 힘으로 이루지 못한다면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말자”고 했다.
김정욱 민주노총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사무국장은 9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한 전 위원장으로부터 지난 5일 받은 편지를 공개했다. ‘사랑하는 아우 정욱에게’로 시작하는 글은 편지지 네 장 분량으로, 지난 1일 한 위원장이 손으로 쓴 것이다.
한 전 위원장은 편지 셋째 장 첫머리에서 “사면 관련 뉴스는 보았다”고 운을 뗀 후 “기대도 하지 않았었고 결정에 대해 조금도 비판하고 싶지 않다”고 썼다. 이어 “노동자를 적으로 규정하고 노골적인 탄압을 자행하던 박근혜 정권에 맞서 투쟁의 앞자리에 서는 것은 민주노총 위원장의 당연한 책무”라며 “(박근혜 정권은) 공포를 확장시켜 노동자 민중의 분노를 잠재우려 했지만 우리는 무릎꿇지 않고 싸운 것”이라고 했다.
한 전 위원장은 “징역을 몇 년 사느냐는 문제는 사치스런 감상일 뿐이었고, 결국 노동자 민중을 짓밟았던 박근혜 정권은 탄핵 구속 되었다”며 “이렇게 빨리 올 지는 몰랐지만 노동자 민중의 분노는 폭발했다. 광장의 감동은 느끼지 못했어도 담장 밖 세상은 경이롭게 느껴진 시간이었다”고 촛불집회와 탄핵에 대한 감상을 밝혔다. 또 “이 순간부터 노동자를 가둔 감옥은 더이상 감옥이 아닌 거라 생각했다”며 “물리적으로 담장 안에 있느냐 동지들 곁에 있느냐는 차이만 있을 뿐”이라고 했다. 이어 “문재인 정부를 탓할 필요도 없다”고 덧붙였다.
한상균 전 민주노총 위원장(56)이 지난 1일 김정욱 민주노총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사무국장에게 보낸 편지 일부. 김 사무국장 제공.
한 전 위원장은 “촛불정부라 자임하지만 정권의 정체성은 노동자의 기대와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 또한 진전일 것”이라며 “분노와 비판은 쉽지만 가슴에 새기고 보란듯이 실력을 키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썼다. 이어 “우리는 나약한 강아지처럼 멍멍거릴 시간이 없다. 노동존중 세상을 노동자의 단결된 힘으로 이루지 못한다면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말자”고 했다.
한 전 위원장은 2015년 1월 민주노총 첫 직선제 선거에서 위원장으로 당선됐다. 임기 첫 해인 2015년 11월14일 민주총궐기 집회를 주도한 혐의로 경찰 수사 대상에 올랐다. 서울 조계사에서 수배생활을 하다가 12월10일 자진으로 퇴거해 경찰에 체포됐고 이듬해인 2016년 1월 공무집행방해와 집시법 위반, 업무방해, 일반교통 방해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지난 5월 대법원에서 징역3년의 실형이 확정됐다.
노동계와 시민사회는 줄기차게 한 전 위원장의 석방을 요구해 왔다. 지난해 5월 방한한 샤란 버로 국제노총 사무총장이 청와대에서 문 대통령을 만나 한 전 위원장 석방을 요청하기도 했다. 한 전 위원장 수감 이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고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가 확산된 것이 지난해 조기 대선으로 이어진 만큼 문재인 정부가 한 전 위원장을 사면할 것이라는 기대가 높았다. 그러나 지난달 29일 정부가 공개한 첫 특별사면 대상자 명단에 한 전 위원장은 들지 않았다.
한 전 위원장은 편지에서 “쌍용차 해고 노동자로 민주노총에게 주어진 막중한 책무를 맡아서 달려온 3년의 시간도 마무리되었구나”라며 “벼랑끝에 내몰린 노동자와 절망의 노동을 떨쳐내려는 노동자 모두의 희망이 되고자 했으나 기대에 부흥(‘응’의 오기로 보임)하지 못하고 마쳤노라는 복귀 보고를 하게 되어 부끄럽고 미안하다”고 했다. 민주노총은 한 전 위원장이 체포된 이래 최종진 전 수석부위원장이 직무대행을 해오다 지난해 두 번째 직선제 투표를 실시했다. 그 결과 지난달 29일 당선한 김명환 지도부는 이달 1일부터 업무에 들어갔다.
해결되지 않은 쌍용자동차 해고자 복직 문제에 대한 소회도 편지에 담겼다. 한 위원장은 편지 첫 장에서 “황금개띠라 말하지만 우리에겐 햇수로 십 년이 되어버린 복직에 대한 절박함뿐이구나”라고 썼다. 또 “아무리 사회적 책임에 적극적인 마힌드라(쌍용자동차 대주주)라고 해도 우리 현장에서 요구가 없다면 나설리가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라고 했다.
마지막 장에서 한 전 위원장은 “가장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투쟁하는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저임금 미조직 노동자가 소수가 아닌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야 할 다수임을 자각하는 새해가 되길 소망해 본다”며 “그 길에 남은 인생을 바치리라고 하얀 벽을 증인 세우고 다짐하며 새해 첫 날을 맞는다”며 편지를 끝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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