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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치고 배우기

유치원·어린이집 방과후 영어수업 금지 ‘유예’...여론에 밀려 후퇴하는 문재인 정부 교육정책들

2018.1.16 노도현 기자


정부가 유치원·어린이집 방과후 영어수업을 금지하겠다던 방침을 사실상 유예하기로 했다. 지나친 조기 영어교육을 제어하겠다는 정책 방향성에도 불구하고, 학부모들을 설득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과정이 충분하지 않았던 까닭에 혼란을 초래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교육부는 조기 영어교육 과열을 줄이고 학교 영어교육 전반을 개선하기 위한 방안을 내년 초까지 마련해 발표할 계획이라고 16일 밝혔다. 신익현 교육복지정책국장은 이날 오전 브리핑에서 “여러 우려와 의견을 받아들여 영어교육을 규제하기에 앞서 유아를 대상으로 한 과도한 사교육, 불법·편법 관행들을 철저하게 개선하는 것이 먼저라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교육부는 시·도교육청과 상시점검단을 꾸려 수업료를 너무 많이 받거나 영어학원과 연계해 편법으로 운영하는 유치원·어린이집을 단속할 방침이다. 방과후 과정은 누리과정 개편에 따라 놀이 중심으로 개선한다. ‘영어유치원’이라 불리는 고액의 유아 영어학원도 단속한다. 2월 초부터 관계부처와 함께 영어유치원이라는 명칭을 불법으로 사용하고 있는지 점검한다. 학부모, 전문가, 학원단체와 논의해 교습시간과 내용, 교습비 등 학원 운영기준을 마련하고 올 하반기 법령 개정을 추진한다. 또 올해 안에 초등 영어교육을 중심으로 ‘학교 영어교육 내실화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신 국장은 “방과후 영어수업을 지양하는 원칙은 분명히 지켜나가되, 열린 마음으로 효과적인 개선방안을 찾겠다”고 덧붙였다. 방과후 영어수업 금지에 대해 ‘유예’나 ‘재검토’ 같은 말은 쓰지 않았지만, 사실상 학부모들 여론에 밀려 결정을 1년 뒤로 미루고 금지 여부를 재검토하겠다는 뜻으로 비친다.

교육부가 한발 물러선 것은 학부모들의 거센 반발 때문이다. 지난해 12월27일 교육부가 ‘유아교육 혁신방안’을 발표하면서 유치원과 어린이집에서 방과후 영어를 가르치지 못하게 하겠다고 하자 학부모들이 많이 찾는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그나마 저렴한 서민층 교육프로그램을 없애면 모두 고액 영어학원에 보내라는 말이냐”는 비난이 빗발쳤고, 이 방침을 철회하라는 청와대 청원까지 올라왔다. 교육부는 1년 유예기간을 두는 것을 검토했다가 이마저도 비판이 거세자 시행을 잠정 보류했다.

시험 위주 경쟁교육, 과도한 사교육을 줄이고 공교육을 정상화하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교육정책이 ‘여론’에 발목 잡힌 것은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8월 교육부는 대학수학능력시험 개편안을 발표하면서 전 과목 절대평가 방안 대신에 몇몇 과목만 절대평가로 바꾸는 방안을 택했다. 

교육 전문가들 사이에선 전면 절대평가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았지만 시험 변별력이 떨어진다는 등의 주장에 밀려 타협안을 골랐으나, 수학 과목을 상대평가로 놔두는 바람에 이도저도 아닌 결정이 됐다는 비판이 일었다. 그나마 이 개편안도 여론에 밀려 2022학년도로 적용을 1년 늦췄다. 당시 김상곤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교육주체 간 이견이 크고 사회적 합의도 충분치 않았다”고 설명했다. 

정부 교육정책 방향에 대한 반발 여론을 의식해 집권여당이 발목을 잡는다는 지적도 나왔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당정협의에서 수능 개편안 시행을 유예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유아 영어교육과 관련해서도 민주당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김 부총리에게 ‘연기’ 의견을 전달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방향이 바람직하다 해도, 교육부가 현장의 목소리를 충분히 듣고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노력 없이 규제만 내세워 혼란을 불렀다는 비판도 있다. 대학입시에서 학생부종합전형(학종)을 확대하겠다는 것이 그런 예다.

시험 한번에 인생이 결정되는 수능 중심 구조를 바꾸고 학교교육을 정상화하겠다는 것이지만 학생과 학부모들은 “금수저 전형을 늘리자는 것이냐”며 분노를 쏟아낸다. 지난해 하반기에 실시된 한 여론조사에서 문재인 정부의 정책 중 교육분야 지지율이 35%로 가장 낮았던 것도 이런 불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