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3.1 남지원 기자
고압선 배전설비 보수 일을 26년 동안 하다가 백혈병으로 숨진 노동자가 산업재해를 인정받았다. 전기를 다루는 노동자가 전자파 때문에 병에 걸렸다며 낸 산재신청이 인정된 것은 처음이다. 전자파와 백혈병의 ‘간접 연관성’을 폭넓게 인정한 사례라 향후 비슷한 사건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1일 근로복지공단에 따르면 공단 산하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2015년 급성백혈병으로 숨진 고압선 정비노동자 고 장상근씨(당시 53세)에 대해 최근 산업재해를 인정했다. 위원회는 전자파와 백혈병 간에 직접적인 의학적 연관성이 입증되지는 않았지만, 업무 환경 등을 고려할 때 간접적인 연관성이 상당 부분 인정된다며 이렇게 결정했다.
장씨는 1990년부터 고압전류가 흐르는 전선(활선)을 직접 손으로 잡고 벗기고 연결하는 ‘활선작업자’로 일했다. 평소 건강했지만 2015년 초 급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고 4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유족에 따르면 장씨를 진료한 의료진은 “저주파로 인한 백혈병 가능성이 있다”는 소견을 냈다. 유족은 장씨가 전자파에 노출돼 백혈병에 걸렸다며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유족급여를 청구했다.
전자파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은 세계적 관심사다. 아직 인과관계가 분명히 입증된 적은 없지만, 주파수가 낮고 강한 전자파에 노출되면 인체에 유도된 전류가 신경이나 근육을 자극해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07년 극저주파 전자파 노출이 소아백혈병과 상관관계가 있다는 연구결과를 인정했다. 성인들이 전자파에 많이 노출되면 백혈병 발생 위험이 올라간다는 연구결과도 여러 차례 나왔다. 2009년 태국에서는 고압전선 근처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백혈병 발생률이 높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국내에서도 장씨 사건 이후 전기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역학조사가 이뤄졌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지난해 전기노동자 37명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활선을 다루는 노동자들은 변전소나 반도체공장 근무자 등 전기를 다루는 다른 직종들보다 전자파에 훨씬 많이 노출돼 있었다. 24명이 작업 도중 수시로 100~300마이크로테슬라(μT)의 극저주파 전자파에 노출됐고, 2명은 국제기구의 ‘직업인 안전기준’인 1000μT를 넘는 전자파에 노출됐다. 건설노조가 2016년 조합원 1100여명의 혈액검사를 했을 때도 백혈구 수치 이상 10명, 갑상선 호르몬 수치 이상 79명 등이 발견됐다. 당시 혈액검사를 실시했던 이철갑 조선대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비용 문제로 대조군 조사를 하지 못해 단언할 수는 없지만, 임상 경험에 비춰볼 때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말했다.
일하다가 병을 얻은 노동자들은 그동안 산재를 인정받으려면 스스로 업무와 질병의 연관성을 완벽하게 입증해야 했다. 이번 결정으로 이런 관행이 바뀔지도 주목된다. 지난해 8월 대법원은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다 희귀병인 다발성경화증을 얻은 노동자의 산재를 인정하면서 “발병·악화와 업무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할 여지가 있다”고 판결했다. 이산노동법률사무소 이진아 노무사는 “법원에 이어 근로복지공단도 노동자의 입증 책임을 덜어주는 전향적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전자파로 인한 직업병을 인정해 달라며 산재보상을 신청한 노동자는 현재 1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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