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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역사왜곡 민원 올라왔다’며 TV프로 징계한 방심위, 알고보니 내부소행 ‘가짜민원’

2018.3.19 노도현 기자

‘역사왜곡 다큐 심의 요청’. 2015년 3월 4일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이런 제목의 민원이 접수됐다. 그 해 2월 방송된 KBS 역사 다큐멘터리 ‘뿌리깊은 미래’ 1부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었다. 2주가량 지나 ‘민원을 추가 신청합니다’라는 글이 다시 올라왔다. 민원인은 모두 고모씨로 돼 있었다.

이 프로그램을 만든 KBS 김형석 PD가 방심위에 불려나갔다. 김 PD는 방송심의소위원회 회의에 출석해 “역사적 사건이나 사회적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원인을 규명하는 정통 역사 다큐라기보다는 어려운 생활을 했던, 평범한 보통 사람들 중심으로 기획한 프로그램”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방심위는 중징계인 ‘경고’를 내렸다. 한국전쟁이 북한의 ‘남침’임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고 ‘뚜렷한 증거 없이 북한군에 부역한 혐의자를 처벌했다’고 했으니 역사를 왜곡했다는 이유를 들었다. 

KBS 1TV <뿌리깊은 미래> ⓒKBS

흥남 철수 당시 부두 폭파 영상을 보여주며 ‘민간인들이 남아있었다’고 한 것도 시청자들에게 역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고 했다. 이 징계를 놓고 ‘정치 심의’ 논란이 일었다. 역사연구 단체들은 방심위가 내세운 징계 사유가 사실과 다르다고 비판했다.

이 징계에 영향을 준 민원이 작성된 장소는 알고 보니 방심위 사무실이었다. 민원인 ‘고씨’가 쓴 걸로 돼 있으나 실제로는 방심위 방송심의기획팀장 김모씨가 만든 것이었다. 정부 입맛에 맞는 역사관을 따르지 않은 프로그램을 제재하기 위해 시청자인 양 ‘가짜 민원’을 만들어 TV프로그램에 재갈을 물렸던 것이다. 김씨는 “전 위원장과 전 부위원장 등의 지시를 받아 친인척 명의로 민원을 신청했다”고 방심위에 진술했다. 방심위는 김씨에 대해 업무조사를 벌인 뒤 파면했다고 19일 밝혔다.

2013년 방심위는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국산 헬기 수리온 실전배치 기념식에 참석한 모습을 보도하면서 북한 인공기를 나란히 배치한 사진을 뉴스 배경에 노출했다며 MBC ‘뉴스데스크’ 관계자들에 대한 징계와 경고를 결정했다. 이것도 김씨의 가짜민원으로 제기된 것이었다. 그가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1~2017년 일반인 이름을 빌려 방심위에 낸 민원은 46건에 이르렀다. 방심위는 이 중 33건에 대해 법정 제재와 행정지도 등의 제재를 가했다.

방심위는 민원인이 아니면서 허위로 민원을 신청한 점, 방송심의 담당자가 이를 모른 채 심의하게 만들어 심의 절차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떨어뜨리고 업무를 방해한 점, 이런 행위를 몇 년 동안 반복한 점 등을 고려해 김씨를 파면했다고 밝혔다. 방심위는 또 김씨를 서울남부지검에 고소하고 지난 정권 시절 방심위에서 벌어진 일들을 철저히 수사해줄 것을 요청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