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군 발암물질인 벤조피렌의 공기 중 농도가 수년째 전국적으로 세계보건기구(WHO) 기준보다 높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벤조피렌은 유해성이 뚜렷해 대기환경보전법상 ‘특정대기유해물질’로 지정됐는데도, 아직 배출 허용기준이 없어 관리와 규제가 ‘공백’ 상태다.
녹색연합은 환경부가 유해대기물질측정망으로 전국 32개 측정소에서 2009~2016년 수집한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발암물질 가운데 특히 대기 중 벤조피렌 함량이 전국적으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2일 밝혔다. 분석 대상 물질은 벤조피렌 등 9종류로, 모두 WHO가 1~2군 발암물질로 지정한 것들이다.
벤조피렌은 화석연료가 불완전 연소할 때 나오는 화합물이다. 아스팔트 공장이나 경유차 배기가스에서 많이 나온다. WHO 가이드라인은 벤조피렌의 경우 1㎥당 0.12나노그램(ng·10억분의 1g)을 참고 기준치로 삼고 있다. 이 기준을 넘으면 인구 10만명당 1명이 암에 걸릴 수 있다는 뜻이다. 각국은 WHO 지침을 바탕으로 규제 목표를 설정한다. 영국은 1㎥당 0.25ng을 기준으로 정하고 있다. 녹색연합 분석에서 대기 중 벤조피렌 농도는 2009년 이래 매년 외국 기준을 초과해온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 기준에 맞춰보면 매년 전국 측정소의 48~87%에서 측정값이 기준치를 넘겼다. 더 엄격한 WHO 기준을 적용하면 93~100%에서 기준치를 웃돌았다. 서울은 모든 측정소에서 벤조피렌 농도가 영국 기준을 넘겼다. 강원 춘천 석사동은 2016년 월별 측정값 최고치가 1㎥당 4.01ng에 달해 전국에서 가장 높았다. 이는 전국 측정소의 최고 농도값 평균의 4배가 넘은 수치다.
그런데 벤조피렌 등 여러 발암물질에 대한 관리와 규제는 없다. 벤조피렌은 주민들이 수년간 집단적으로 암에 걸린 것으로 드러난 안양 연현마을과 남원 내기마을 등지에서 암 발병 원인 물질로 지목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동안 이 지역들에서 벤조피렌 농도를 측정한 적은 없었다. 배출량 기준이 없기 때문에 대기오염 물질 배출시설 인허가 때도 벤조피렌이 배출되는지는 점검하지 않는다. 앞서 환경부 의뢰로 배출 허용기준이 없는 대기오염 물질들에 대해 연구한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도 보고서에서 “벤조피렌은 산업공단뿐만 아니라 일반 도시지역에서도 검출 빈도가 높다”고 지적한 바 있다.
벤조피렌 외에 녹색연합이 분석한 벤젠, 에틸벤젠, 스틸렌, 클로로포름, 트리클로로에틸렌, 테트라클로로에틸렌, 사염화탄소, 1, 3-부타디엔도 모두 1~2군 발암물질이다. 그러나 이 중 대기오염 기준농도가 설정된 물질은 벤젠뿐이다. 사업체 규제를 위한 배출량 기준도 벤젠과 트리클로로에틸렌 외에는 정해져 있지 않다. 녹색연합은 “벤조피렌을 비롯한 특정대기오염물질은 유해성이 커서 법령으로 특별히 지정했는데도 관리 사각지대에 놓여있다”고 지적했다. 또 “특정 지역에서 특정 물질이 많이 배출되는 경우 지역별로 원인을 따져봐야 하는 데도 불구하고 이런 노력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정부는 미세먼지만 놓고 대책을 세울 것이 아니라 여러 대기오염 요인을 고려하여 종합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환경부는 현재 기준이 없는 벤조피렌 등 6개 물질에 대해 올해 안에 배출량 기준치를 설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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