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기능이 14%밖에 남지 않은 아내는 인공호흡기로 겨우 숨을 쉬고 있다. “먹어야 살아, 이사람아…” 아기용 죽을 쒀 목에 꽂힌 관으로 흘려보내도 아내는 거의 먹지 못한다. 남편은 아내가 안보이는 곳에서 홀로 숨죽여 운다.
김태동씨(62)의 아내 박영숙씨(58)는 교회 성가대에서 소프라노를 맡을 정도로 성량이 풍부했다. 오랫동안 이마트 가습기살균제(애경·SK케미칼 제조)를 써 왔던 박씨는 2008년 어느날 “숨이 안쉬어진다”고 했다. 병원으로부터 ‘이미 폐기능이 46%밖에 남지 않았다’는 진단을 받았다. 9년이 흐른 지금은 병원에서조차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할 정도다.
2011년 질병관리본부가 정체불명의 폐섬유화의 원인이 가습기살균제라는 사실을 밝힌 후 박씨 부부는 정부에 피해신고를 했다. 그러나 정부는 박씨를 ‘피해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결국 아무런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집안은 이미 병원비 부담 등으로 파탄이 났다.
정부가 그동안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했던 이들 중 일부에게 이르면 10월말부터 피해자로 인정받은 이들과 같은 수준의 구제급여를 지급하기로 했다. 2011년 7~8명의 산모가 의문사하면서 가습기살균제 참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지 6년만이다.
환경부는 가습기살균제 특별법에 따라 만들어진 ‘구제계정운용위원회’에서 ‘가습기살균제 건강피해 미인정자 구제급여 지급계획’이 의결됐다고 12일 밝혔다. 구제계정운용위원회는 가해기업들이 돈을 갹출해 만든 특별 구제계정(현재 1250억원)의 기금을 가지고 정부로부터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한 이들에 대한 지원여부 등을 심사하는 기구다.
그동안 정부는 가습기살균제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며 신고한 이들에게 바늘구멍 같은 피해인정 기준을 들이대 비판을 받아왔다.
2011년 질병관리본부는 가습기살균제가 폐를 딱딱하게 굳게 만드는 폐섬유화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그러나 정부와 전문가위원회는 폐섬유화 질환 중에서도 소엽중심성(말단 기관지 중심으로 특정형태를 띠는 부분파괴), 폐영상 사진의 ‘간유리음영’(김이 서린 것처럼 뿌연 막이 보이는 현상), 급성진행 등의 조건이 부합하는 경우에만 1단계(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질환 가능성 확실) 혹은 2단계(가능성 높음)로 분류해 피해자로 인정했다.
같은 폐섬유화라도 이런 기준을 충족하지 않으면 3단계(가능성 낮음)나 4단계(가능성 거의 없음)로 분류했다. 특히 폐섬유화가 아닌 다른 질환을 앓고 있는 이들은 모두 4단계 판정을 받았다. 3·4단계 판정자는 특별법에 따른 피해자로 분류되지 않아 아무런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까다로운 인정 기준 탓에 지금까지 가습기살균제 피해인정 심사가 완료된 2196명 중 17%만 공식 피해자로 인정받았다. 나머지 1819명 가운데 3단계 판정자는 208명, 4단계 판정자는 1541명이다. 3632명은 아직 심사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구제계정운용위원회는 정부가 그동안 공식 피해자로 분류하지 않은 3·4단계 판정자 가운데 3단계 판정자(208명)를 심사해 1·2단계 판정자와 같은 수준의 구제급여를 지급할 예정이다. 1·2단계 판정자의 경우 유족에게는 장의비와 유족조의금이 지급됐고 피해자에게는 의료비 전액, 요양생활수당, 간병비 등이 지급되고 있다.
환경부 관계자는 “3단계 판정자는 이미 가습기살균제와 폐손상간의 의학적 개연성, 가습기살균제 사용 이후의 발병 사실 등을 입증한 상태이기 때문에 주로 중증 여부, 질환의 지속성 여부에 대해 심사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폐손상이 매우 경미했거나 완치가 쉽게 끝난 사례가 아니라면 대부분 심사를 통과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3단계 판정자에게 구제급여를 지급하기 위한 심사는 12일부터 바로 시작되며 10월 말 완료된다. 구제급여는 심사완료 후 바로 지급된다.
앞서 구제계정위원회는 3·4단계 판정자에 대한 지원계획을 논의해 왔으며 지난 8월 25일 건강피해 미인정자의 피해구제 전문위원회를 별도로 구성한 바 있다. 폐섬유화 이외의 다른 질환도 함께 앓고 있는 3단계 판정자의 경우 의료비 전액이 지급될지 여부는 전문위원회의가 추가로 논의할 것으로보인다.
구제계정위원회는 4단계 판정자 지원을 위한 전문위원회도 11월부터 운영해 지원 심사기준을 마련하기로 했다. 4단계 판정자들은 대부분 폐섬유화 이외 질환으로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지원은 가습기살균제 피해인정 질환을 어디까지 확대할 것이냐에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가습기살균제 특별법은 피해인정 여부를 의결하는 최상위 기구로 ‘피해구제위원회’를 두고 있다. 피해구제위원회는 폐섬유화 외에 천식을 추가로 가습기살균제 피해 질환으로 인정할지 여부를 놓고 논의 중이지만 지난달 10일 이후 회의 개최도 하지 못하고 있다. 환경부 관계자는 “위원들간에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고 전했다.
환경보건시민센터는 3단계 판정자에 대한 구제급여 지급계획에 대해 “정부는 3단계 판정자들을 특별법에 따른 피해자로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기업들이 만든 기금으로 단순 지원만 하려 하고 있다”면서 “3단계 판정자를 비롯해 가습기살균제 노출 이후 건강피해가 확인된 이들에 대한 기업의 법적 배상책임을 확실히 하기 위해선 이들을 공식적인 피해자로 인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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