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겸 MBC 사장 퇴진을 주장했다가 징계를 앞두고 있는 김민식 PD가 24일 MBC노조 사무실에서에서 경향신문 취재진과 만나 만나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수많은 청소년들에게 대학 생활의 환상을 심어준 시트콤 <뉴논스톱>, 무능한 남편을 대기업 정직원으로 만들려 고군분투하는 아내의 이야기를 담은 <내조의 여왕>. 시트콤과 드라마를 종횡무진하던 김민식 MBC PD(49)는 요즘 김장겸 사장 퇴진 투쟁의 아이콘이 됐다. 김 PD는 지난달 2일 “김장겸은 물러나라”는 구호를 외치는 모습을 약 3분간 페이스북으로 생중계했다가 한 달 간 자택 대기발령을 받았고 인사위원회에 회부됐다. MBC는 인사위 개최 통보서에 “정상적으로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대표이사에 대해 근거 없이 ‘물러나라’고 해 회사의 지휘체계를 훼손하고 직장 질서를 문란하게 했다”고 적었다.
로맨틱코미디를 만들던 PD는 왜 사장 퇴진 투쟁의 전면에 나섰을까. 24일 서울 상암동 MBC 사옥에서 김 PD를 만났다.
김 PD가 노조에 발을 담근 것은 정영하 전 노조위원장과의 친분 때문이다. “원래 투사 체질이 아니었다. 친구들이 민주화 투쟁할 때 때 나이트클럽에서 춤추고 영어공부만 했다”고 그는 말했다. 입사할 때부터 노조에 가입하긴 했지만 한 번도 전면에 나선 적은 없었다. 그러다 친한 선배였던 정 위원장을 돕기 위해 부위원장을 맡으면서 2012년 170일간의 파업 때 선봉에 섰다. 다른 노조 집행부들과 함께 업무방해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돼 영장실질심사를 받느라 경찰서 유치장 신세까지 졌다.
“그때 우리끼리 유치장에서 ‘구속이 되려면 차라리 다섯 명이 다 구속됐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했다. 영장은 기각됐지만 함께 유치장에 있던 다섯 명 중 셋은 결국 해고됐다. 그는 정직 6개월을 받아 회사에 남았다. 해고 다음의 중징계였다. 그는 ‘저들은 해고되고 나는 아직 남아있는 이유가 무엇일까’라는 고민을 오랫동안 했다고 한다. “만약 다음 기회가 온다면 내가 이 안에서 싸워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오래 했다. 그게 내가 이 안에서 5년간 버티게 된 이유 아니었을까.”
김 PD는 파업 후 드라마 메인 연출을 맡지 못했다. MBC는 파업에 참여한 조합원들을 집요하게 업무에서 배제했다. 여러 기자와 PD, 아나운서들이 업무와 무관한 부서로 배치됐다. 드라마국에 남은 김 PD도 처지는 비슷했다. 파업 전부터 오랫동안 준비했던 드라마는 다른 방송사에서 <너의 목소리가 들려>라는 제목으로 인기리에 방영됐다. 일일드라마를 기획했는데 정작 연출은 다른 사람이 맡았다. “임원회의에서 ‘파업에 앞장섰던 노조 집행부가 어떻게 뉴스데스크 앞 연속극 연출을 맡느냐’는 이야기가 나왔다고 들었다”고 그는 말했다. 2015년 드라마 <여왕의 꽃>에서는 갓 입봉한 PD가 맡는 야외연출을 맡았다. 드라마는 시청률 20%를 넘나들며 순항했지만, 종영 직후 그는 편성본부로 발령됐다.
드라마국에서 밀려난 후 그는 작가들을 만나는 일을 그만뒀다. 작가를 만나도 ‘만약에’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MBC가 바뀌면, 만약에 사장이 바뀌면.. 이런 말로 지난 몇 년간 너무 많은 작가들에게 희망고문을 했다. 몇 년 뒤에라도 사장이 바뀌긴 하겠지만, 연출도 운동처럼 계속해야 근육이 크는 일이라 이렇게 오래 쉰 내가 좋은 드라마를 만들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드라마 연출에서 계속 밀려나면서도 김 PD는 내부에서의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지난해 ‘비선실세’ 정윤회의 아들 정우식이 회사 간부들의 압력으로 여러 드라마에 출연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김 PD가 후배들을 대신해 총대를 맸다. 장근수 드라마본부장이 때로는 제작사 대표를 통해서, 때로는 연출자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정씨를 반드시 드라마에 출연시키라고 종용했다고 폭로했다. 하지만 장 본부장은 올 초 강원영동MBC 사장으로 오히려 영전했다.
복도에서 “김장겸은 물러나라” 동영상 생중계를 하게 된 것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쏟아진 보도국 기자들의 성명서에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낸 목소리를 읽었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기자들 성명서에 ‘기자의 명줄을 잘라놓겠다는 살의를 느꼈다’는 대목이 있었다. 나도 똑같은 기분이었다. 저들은 PD로서의 나의 명줄을 잘라놓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전문]“PD로서 명줄을 잘라놓겠다는 살의를 느꼈다” <내조의 여왕> 김민식PD의 경위서
그의 징계 수위를 결정하는 인사위가 열린 지난 13일 MBC 구성원 수십명이 로비에 모여 “김장겸은 물러나라”는 구호를 외치며 김 PD를 응원했다. 그의 행동이 또다른 행동을 이끌어낸 것이다. 김연국 언론노조 MBC본부장은 “오늘 인사위는 김 PD가 아닌 우리 모두에 대한 인사위”라고 했다. 그날 인사위에서 김 PD는 54쪽짜리 소명자료를 읽는 ‘필리버스터’를 했다. 사측은 지난 21일 인사위를 한 차례 더 열어 중징계를 강행할 뜻을 시사했다.
김 PD는 “순순히 해고당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5년간 MBC에서는 해고가 너무 쉬웠다. (2015년 해고됐다가 복직한) 권성민 PD는 예능 PD의 일상을 웹툰으로 그렸다 해서 해고됐다. 박성제 기자와 최승호 PD를 이유 없이 해고했다고 말한 녹취록까지 나왔지만 그 말을 한 당사자는 뻔뻔하게도 부사장으로 영전했다.” 그는 “나를 해고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꼭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MBC 김민식 PD가 회사에 제출한 경위서 전문
경 위 서
편성본부 김민식
MBC 드라마본부의 가장 큰 어려움은 일일 연속극의 제작입니다. 뉴스데스크 앞뒤로 비슷비슷한 포맷의 연속극을 주5일 연속 방송하기에 차별화도 쉽지 않고, 방송분량이 많아 일주일에 며칠씩 밤을 새워 근근이 제작하는 실정입니다. 시청률을 의식해 극성이 강한 드라마를 만들면 ‘막장’이라는 평가를 받고, ‘착한’ 드라마를 편성하면 시청률 경쟁에서 고배를 마시기 쉽습니다. 광고판매 또한 부진해 연출 입장에서는 열심히 만들고도 회사에 손해를 끼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연출들이 기피할 수 밖에 없고, 제작사에서도 잘 들어오려 하지 않는 시간대입니다.
2014년 봄, MBC 드라마본부는 외주 기획사에서 만든 한 일일극 기획안의 편성을 결정합니다. SBS와 논의 중이던 편성을 MBC로 옮기라고 제작사에 요청합니다. 제작사 대표로서는 MBC로 옮겨야하는 명분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내세운 조건이 MBC에서는 원하는 연출을 주기로 했다고 SBS에 말하고 옮겼습니다. 저의 주말연속극 연출작인 ‘글로리아’를 제작했던 외주제작사였습니다. 드라마국 부장님이 제게 제작사의 요청이 있으니 일일연속극 연출을 맡아달라고 했습니다. 이후 저는 보직 부장님과 국장님의 지시에 따라 제작사와 만나 배우 캐스팅을 진행하고 작가와 대본 방향을 논의했습니다.
일일극 ‘소원을 말해봐’는 식물인간이 된 남편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주인공의 이야기입니다. 여주인공 캐스팅이 작품 성공의 관건이라 판단한 저는 개인적 친분을 이용해 여배우 OOO씨에게 연락했습니다. 청춘시트콤 ‘뉴 논스톱’을 만들며 신인이던 OOO씨를 캐스팅한 바 있습니다. 이후 개인적으로 만난 적도 한 번도 없었지만, MBC 일일연속극 경쟁력 강화를 위해 OOO씨를 설득하려고 했습니다. 연속극에 단 한 번도 출연한 적이 없는 중량급 스타를 기용함으로써 MBC 일일극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싶었습니다.
배우 미팅을 앞두고 있는데, 갑자기 회사로부터 일일극 연출 하차 통보가 왔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었습니다. MBC 임원회의에서 새 일일극 편성을 보고했는데, “김민식PD는 파업에 앞장섰던 노조 집행부인데, 그런 친구가 어떻게 8시 MBC 뉴스데스크 바로 앞 연속극 연출을 맡을 수 있단 말이냐. 당장 빼라.”는 얘기가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방송 일정이 촉박하여 다른 연출을 구할 수 없었기에 결국 담당 부장이 직접 보직에서 물러나 일선으로 복귀해 프로그램을 급히 제작해야 했습니다. ‘김민식의 이름을 걸고 드라마를 만드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는 말이 돌았습니다. 드라마 본부에서 정한 라인업을 뒤엎은 장본인이 보도국 간부라는 이야기까지 들었지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부문별 제작 자율성 침해였고, 무엇보다 드라마 경쟁력 제고와 광고 판매에 방해가 되는 해사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2015년 가을, 새 주말 연속극 기획안이 MBC에 들어왔습니다. 당시 제작사는 예전에 ‘아직도 결혼하지 않은 여자’라는 미니시리즈를 연출할 때 함께 작업했던 김종학 프로덕션이었습니다. 제작사 측에서 ‘여왕의 꽃’의 야외연출로 저를 원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연속극 야외 연출은 주로 조연출이나 갓 입봉한 신인 PD가 담당하는 업무입니다. 연출로 입봉한 지 15년이 된 제가, 심지어 주말 연속극의 메인 연출을 했던 저에게 야외연출은 징계에 가까운 일입니다. 드라마본부 내부에서 가장 배정하기 힘든 업무가 연속극의 공동연출입니다. 캐스팅이나 대본 참여의 권한은 없이 오로지 밤을 새워 야외촬영만 담당합니다. 감독의 권한의 최소한이요, 일은 많습니다. 미니시리즈 공동연출이라면 새로운 영상 감각을 시도하고 연출로 성장할 기회라도 있지만, 연속극은 6개월 동안 기계적으로 찍어나가기만 합니다. 어린 후배들이 매번 돌아가며 고생한다는 것을 알기에 기꺼이 제가 하겠다고 했습니다. 나이 마흔 여덟 먹은 드라마 감독이 연속극 야외 연출을 맡은 건 MBC 창사 이후 제가 처음인 것으로 압니다.
주말연속극 ‘여왕의 꽃’은 첫 회 시청률 20%를 넘기고 광고도 매회 100% 완판에 가까운 판매고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저는 야외촬영을 하면서 늘 이상한 소문에 시달렸습니다. ‘김민식이 야외 연출로 일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보도국 간부가 임원회의에서 불만을 토로했단다.’ ‘이번 드라마가 끝나면 더 이상 드라마본부에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야외연출이 아니라 조연출도 시켜서는 안 된다.’ 1주일에 3,4일씩 밤을 새며 촬영했습니다. 하루 고작 2~3시간밖에 못 자고 병원에 달려가 영양제 주사를 맞아가며 촬영했습니다. 전쟁터에서 목숨걸고 싸우는데 정작 뒤에 있는 지휘 초소의 저격수들은 내 뒤통수에 총구를 겨누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2016년 가을, ‘여왕의 꽃’은 마지막 회에 시청률 20을 넘기고 유종의 미를 거두고 종영했습니다. 드라마 끝나자마자 바로 인사발령이 났습니다. 제작기간 동안 쌓인 주말 대휴를 소진하지도 않았는데, 편성본부로 발령이 났습니다. 편성본부에 달려가 물었습니다. “무슨 업무로 나를 부른 것입니까?” 누구도 명쾌한 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우린 인원을 요구한 적이 없는데 왜 보냈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에 어이가 없었습니다.
주조정실에서 MD로 1년 반 동안 근무했습니다. 일근과 야근을 교대로 하면서, 밤을 새워 주조정실 콘솔 앞을 지켰습니다. 늘 궁금했습니다. ‘이토록 집요하게 나의 연출을 방해하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지난주, 회사 게시판에 올라온 보도국 기자들의 성명을 읽었습니다.
매일 올라오는 보도국 기자들의 성명서를 읽었지만, 그 중 다음과 같은 구절은 제 폐부를 깊숙이 찔렀습니다.
‘후배의 세 번째 인사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이유가 없었고 전격적이었다. 선배는 그 속에서, 다시는 이 자에게 기자를 시키지 않겠다는, 기자의 명줄을 잘라 놓겠다는 살의를 느꼈다.’
전율이 흘렀습니다. 지난 5년 동안, 저는 PD로서 저의 명줄을 잘라 놓겠다는 살의를 느껴왔습니다. 그런데, 그게 저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기자들의 글에 너무 가슴이 아팠고, 그들에게 달려가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당신들의 고통을 내가 안다. 당신들의 고통이 끝나기를 바란다.”고 말입니다.
이에 저는 개인 페이스북으로 의사표현을 했을 뿐입니다. 개인 페이스북을 이용한 평화로운 1인 의사표현이었고, 다른 동료의 업무를 방해하거나 회사 업무에 지장을 초래한 사실이 없습니다.
이상 사실대로 진술하였음을 확인합니다.
2017. 6. 7. 진술인 김민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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