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학년도 대입제도 개편을 위해 정부가 추진하는 공론화 과정이 벌써부터 파열음을 내고 있다. 공론화위원회가 여런 단체들과 4개의 대입개편 의제를 만들어 시민참여단에게 자료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일부 의제 참여팀이 절차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교사들 모임인 좋은교사운동은 18일 서울 관악구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4개 의제팀이 상호 검증 과정에서 발견된 잘못된 수치나 불분명한 자료 출처 등을 명확히 한 후 내기로 했는데 일부 팀이 우리 팀의 수능 절대평가 찬성 논리 등을 보고 추가로 새 반박 논리들을 만들어 자료에 추가했다”며 “뒤늦게 이같은 사실을 알고 공론화위원회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위원회는 자료집이 인쇄절차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묵인했다”고 밝혔다.
수능을 절대평가로 바꿀 것인지는 이번 공론화 과정에서 가장 첨예한 의제로, 이 단체가 포함된 의제 2팀만이 절대평가 전환에 찬성했다. 교육부는 당초 절대평가화를 고민했으나 사교육업계와 학부모들의 반발에 밀려 지난해 결정을 뒤로 미뤘고, 결국 공론화 쪽으로 공을 넘겼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대입제도 개편방안에 대해 지난 9~15일 중고등 교사 1876명에 대해 의견조사한 결과 82.6%가 절대평가 전환에 찬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좋은교사운동 관계자는 “검증회의를 통해 상대방 자료를 다 본 후에 이를 반영·보완하는 것은 부정행위와 같다”며 “자료 검증 과정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다보니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공론화위원회의 해당 책임자 교체를 요구한다”고 밝혔다.
대입제도 개편을 위한 시민참여단은 지난 14~15일 수도권·충청·호남·영남 네 권역에서 1차 토론회를 마쳤고, 오는 27~29일 한자리에 모여 2차 토론회를 한다. 교육부는 시민참여단의 두 차례 토론 결과를 바탕으로 다음달까지 대입제도 개편안을 마련한다. 한동섭 공론화위원회 대변인은 “자료 마감일에 맞춰 자료를 고치는 팀은 고쳤다”며 “공론화는 공정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각 의제팀들이 모여 만든 ‘룰’을 따랐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입개편이라는 중차대한 국가의제를 다루는 시민 토론이 갓 시작되자마자 불거진 이같은 불만은 향후 공론화 과정의 신뢰성에도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최근 교육계 곳곳에서 ‘공론화 바람’이 불면서 정책 결정의 새로운 방식으로 떠오르고 있으나, 일부에선 졸속으로 추진될 수 있다며 우려를 나타낸다. 국가교육회의 산하 공론화위가 주관하는 대입제도개편 공론화에 더해, 교육부는 주요 교육정책을 추진하기 앞서 최대 6개월간 여론을 듣는 ‘국민참여 정책숙려제’를 올초 도입했다. 지난해 수능 개편 연기부터 올해 초 어린이집·유치원 영어 특별활동 금지까지 굵직한 교육정책들이 현장 반발에 부딪혀 무산되자, 정책 수립 단계부터 시민 의견을 모으겠다는 취지였다. 정책숙려제 1호 안건은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 신뢰도 제고방안’이었다. 지난달에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진상조사위원회가 8개월간의 진상조사를 마무리하며 역사교육 공론화를 주관하는 기구를 설치하라고 교육부에 권고했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조만간 ‘교육공론화 시민참여단’(가칭)을 출범시킨다. 1호 안건은 두발·복장 자유화다. 이달 말 첫 회의를 열고 구체적인 공론화 방법과 절차를 논의한다. 이석문 제주교육감도 ‘제주교육 공론화위원회’를 만들 방침이다. 공론화위에서는 유·초·중·고 무상교육, 학교 비정규직 문제, 특목고와 자사고의 일반고 전환 등을 논의한다. 박종훈 경남교육감은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공론화하기로 하고 최근 담당 부서에 공론화 계획을 짤 것을 주문했다.
지난해 신고리 원전 공론화는 ‘5·6호기를 지을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였지만, 대입은 한층 복잡해 제대로 된 합의점을 찾을 수 있을지 우려가 적지 않다. 그럼에도 공론화는 교육정책 결정 수단으로 한동안 유행할 것으로 보인다. 교육 분야는 이해관계자가 많고 다양한 논점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이 독점했던 교육정책 결정 과정이 시민에게 열린다는 게 공론화의 가장 큰 이점이다. 안선회 중부대 교수는 “어떤 결과가 나오든 공론화를 경험한 이상 국민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정책은 이전의 폐쇄적인 결정 방식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됐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책의 방향성을 잡고 힘있게 수행해야 할 당국이 결과에 대한 책임까지 여론으로 떠넘긴다는 비판적인 시선도 있다. 관건은 ‘준비된 공론화’다. 어떤 의제에 대해 여론을 수렴할지, 방식은 어떻게 할지 잘 계획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이강원 한국사회갈등해소센터 소장은 “참여형 의사결정이 정말로 필요한 의제인지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아무리 취지가 좋더라도 졸속으로 추진되면 시민들에게 피로감만 남길 뿐 결실을 맺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론화위원회에 참여했던 김동원 강원대 교수는 “의제를 철저히 검토하지 않고 토론에 부치면 공직자의 직무유기와 사회적 비용 낭비로 비치면서 공론화에 대한 인식이 나빠질 수 있다”고 말했다.
국가나 지자체가 지향해야 할 더욱 근본적인 교육 철학이나 가치를 시민들의 토론 의제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강태중 중앙대 교수는 “어떤 정책이 더욱 교육적이고 공정한지 논의해야지, 구체적인 시행안을 결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면서 “정책결정자들이 공론화에 앞서 정책을 ‘숙고’하지 않으면, 시민들이 제대로 ‘숙려’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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