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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반올림 중재합의]택시에서 숨져간 딸, 11년만에 지켜진 ‘아버지의 약속’

“우리 유미가 백혈병에 걸린 지 13년이 넘었습니다. 화학약품에 병들고 죽어간 노동자 문제를 이렇게 긴 시간 해결하지 못한 건 참 섭섭한 일입니다. 정부도 회사도, 존재하는 이유를 안 물어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말아야 합니다.”

손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를 읽어내려가던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63)가 끝내 눈물을 쏟았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급성 백혈병에 걸린 딸이 자신이 운전하는 택시 뒷좌석에서 숨을 거둔 지 11년. “왜 그런 병에 걸렸는지 이유를 꼭 밝혀주겠다”고 딸에게 다짐했던 아버지는 길고 힘겨운 싸움 끝에 마침내 약속을 지켜냈다.

24일 서울 서대문구 법무법인 지평에서 열린 ‘삼성전자-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조정위 3자간 제2차 조정재개 및 중재방식 합의서명식’에서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가 눈물을 보이며 발언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과 삼성전자는 24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법무법인 지평 회의실에서 ‘삼성전자 반도체 등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가 앞으로 내놓을 사과·보상 관련 중재안을 무조건 수용한다는 내용의 중재합의서에 서명했다. 삼성전자에서는 김기남 대표이사를 대신해 김선식 전무가, 반올림과 피해자들을 대표해서는 황씨가 참석했다. 김 전무는 “중재 방식을 수용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지만 완전한 문제 해결만이 발병자들과 그 가족의 아픔을 위로하고 사회적으로도 가치 있는 일이라 판단했다”며 “조정위원회의 향후 일정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말했다.

조정위원회는 곧바로 중재안을 만드는 작업에 들어간다. 2015년 1차 조정 때 들었던 양측 입장과 다른 반도체 사업장에서 이미 실시한 보상안 등을 검토하고, 산업안전보건 전문가들로 자문위원회를 구성해 사회적 논의를 거쳐 중재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9월 말~10월 초 사이 공개될 중재안에는 새로운 질병보상규정과 절차, 반올림 소속 피해자 보상안, 삼성전자 측의 사과 권고안, 재발방지·사회공헌 방안 등을 담기로 했다.

[삼성-반올림 중재합의]택시에서 숨져간 딸, 11년만에 지켜진 '아버지의 약속'

2028년까지 10년에 걸쳐 삼성 작업장들에 적용될 직업병 피해자 보상의 기준을 만드는 것이라 조정위원회가 어떤 안을 내놓을지 관심이 쏠린다. 김지형 조정위원장은 “중재안에 반올림 피해자뿐 아니라 전반적인 산업안전보건 문제의 불확실성에서 비롯되는 직업병 발병 위험에 실효적으로 대처하는 방향까지 담겠다”며 “무거운 책임과 소명감을 갖고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중재안을 내놓을 것”이라고 말했다.

2차 조정이 이날 공식 재개되자 반올림은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에서 1000일 넘게 지켜왔던 농성 천막을 25일 저녁 접기로 했다. 반올림은 “길고 힘든 지난 시간이 없었다면 내딛지 못했을 소중한 한 걸음이었다”며 “고통과 절망, 분노의 시간을 견디면서 서로 잡은 손을 놓지 않아주셨던 피해 노동자와 가족들의 인내에 경의를 표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