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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는 장관’이라더니… 소속기관 비정규직과 직접 교섭 못한다는 문체부

민주노총 문체부 교섭노조연대 소속 노동자들이 9일 오전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직접 교섭에 나설 것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민주노총 문체부 교섭노조연대 소속 노동자들이 9일 오전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직접 교섭에 나설 것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비정규직 행정조교들이 중심이 된 전국대학노조 한예종비정규직지부는 지난 1월부터 한예종과 임금과 노동조건 등의 문제를 놓고 13차례 단체교섭을 했다. 의견차가 잘 좁혀지지 않아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조정신청까지 낸 상황에서, 노조는 갑작스럽게 지노위에서 “문화체육관광부와 교섭을 다시 하라”는 결정서를 받았다. 노조법상 단체교섭은 고용계약을 맺은 ‘사용자’와 해야 하는데, 문체부 소속기관인 한예종 노동자들의 사용자는 한예종이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 즉 문체부라는 것이다. 반년 가까이 진행된 교섭이 무산된 노조는 다른 문체부 소속기관 노동자들과 함께 문체부에 교섭을 다시 요구했지만, 문체부는 이번에는 거꾸로 “기관장에게 교섭권을 위임할테니 한예종과 교섭하라”고 통보했다. 노조 관계자는 “‘진짜 사장’을 찾아 교섭을 요청했는데, 다시 권한 없는 기관장들에게 교섭권을 위임하면 어쩌라는 이야기냐”고 말했다.

한예종과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국악원, 국립중앙도서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9일 서울 중구 민주노총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진짜 사장인 도종환 문체부 장관이 비정규직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교섭에 나서라”고 요구했다. 중앙박물관과 국악원, 중앙도서관 비정규직 노동자들 역시 한예종과 마찬가지로 교섭 도중 소속기관으로부터 사용자성 문제로 교섭을 중단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교섭 성과는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 중앙박물관은 노조와 인건비 문제, 노조활동 근로시간 면제 등을 합의한 상태에서 “문체부와 교섭 입장이 정리되기 전까지 교섭할 수 없다”고 노조에 알렸다. 중앙도서관도 사전합의서까지 체결한 상태에서 기관 측이 사용자성 문제 때문에 교섭을 중단했다.

네 노조는 “교섭이 올스톱돼 당황스러웠지만 오히려 잘된 일일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기관 차원에서는 풀기 어려운 예산과 인력, 현장과 맞지 않는 문체부 지침 등 근본적 문제를 정부와 직접 논의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학교비정규직노조가 지난해 교육부 및 15개 시도교육청과 집단교섭을 벌인 사례가 있고, 보건복지부도 조만간 보건의료노조 소속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직접 교섭에 나설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네 노조는 지난 6월 교섭대표노조를 결정해 문체부에 단체교섭을 요청했다.

하지만 문체부는 직접 교섭에 응하지 않고 “교섭·체결권을 소속기관에게 위임하니 각 기관과 교섭해달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노조법에는 사용자가 다른 사람에게 교섭권과 단협 체결권을 위임할 수 있다고 돼 있긴 하지만, 노조는 “권한 없는 기관장과 교섭을 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박주영 민주노총 법률원 노무사는 “정원과 예산 등 핵심 교섭사안의 결정권이 사용자인 문체부에 있고, 문체부가 직접 나서지 않으면 정상적 교섭이 진행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교섭 해태로 판단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문체부는 각 기관의 노동조건과 예산 등 실태를 잘 아는 기관장이 비정규직 노동조건을 개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교섭권을 위임한 것이라고 밝혔다. 문체부 관계자는 “소속기관별로 특성이나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기관별로 협의하도록 한 것”이라며 “다만 제도개선이나 인력, 예산문제 등에 대한 최종 책임은 문체부에 있기 때문에 이런 문제들은 문체부도 같이 논의하고 검토해나가도록 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