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8.9 노도현 기자
오전 6시20분에 시작한 촬영은 다음날 새벽 5시50분이 돼서야 끝났다. 꼬박 23시간30분이 걸렸다. 2시간 뒤 다음 촬영 일정이 시작됐다. 스태프들은 잠을 자기는커녕 촬영장 근처 사우나에서 물만 끼얹고 다시 일터로 나가야 했다. 지난달 초 진행된 SBS 주말드라마 ‘그녀로 말할 것 같으면’의 제작현장 상황이다. 한번 촬영을 나갈 때면 반나절은 기본, 하루를 몽땅 바쳐야 하는 날이 잦았다.
다른 드라마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tvN ‘아는 와이프’의 경우 촬영시간을 기록한 16일 중 하루 18시간 이상 촬영한 날이 11일이나 됐다. 이 중 5일은 20시간을 초과했다. tvN ‘식샤를 합시다3 비긴즈’는 하루에 최소 12시간, 최대 17시간까지 촬영했다. 12시간 넘게 일하면서 저녁식사를 건너뛴 날도 있었다. JTBC ‘라이프’는 최소 14시간에서 최대 20시간, JTBC ‘내 아이디는 강남미인’은 최소 15시간에서 최대 23시간을 촬영했다.
방송스태프노조와 정의당 추혜선 의원이 9일 국회 정론관에서 드라마 제작현장의 노동시간 실태를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권호욱 선임기자
지난달 4일 출범한 방송스태프노조와 정의당 추혜선 의원은 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드라마 제작현장의 ‘살인적인’ 촬영 일정을 공개했다. 하루에 최소 9시간이었고 20시간 이상도 비일비재했다. 드라마 제작현장의 장시간 노동 문제는 과거부터 제기돼 왔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최근 한 스태프의 죽음이 알려지면서 장시간 노동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더 커졌다. 지난 1일 SBS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 제작현장에 포커스풀러로 참여했던 김모씨(30)가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포커스풀러는 카메라 렌즈의 포커스 링을 움직이며 초점을 유지해주는 역할이다. ‘과로사’ 의혹이 일었지만 사인은 내부 요인에 의한 뇌출혈로 밝혀졌다. 방송스태프 노조와 언론노조, SBS노조 등은 고인이 올해 30세로 평소 지병이 없었던 점, 지난달 25일부터 29일까지 5일간 야외에서 76시간에 달하는 노동에 시달린 점을 들며 장시간 노동 관행을 고쳐야한다고 촉구했다. 노조가 조사한 이 드라마의 하루 최대 촬영시간은 19시간이었다.
근로기준법 개정으로 방송계는 지난달부터 주 68시간을 초과해 일할 수 없다. 하지만 방송제작 노동자들에게 법은 ‘그림의 떡’일 뿐이다. 방송스태프노조는 “‘인간다운 삶을 향한 첫걸음’이라는 노동시간 단축이 시행됐는데도 드라마현장은 아직도 법의 울타리 밖, 무법지대에 놓여 있다”며 “버젓이 24시간 노동이 명시된 계약서를 강요하고 최저임금조차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죽을 것 같이 일하면 죽습니다. 지금 방송현장에서 들리는 방송스태프들의 절규는 은유나 과장이 아닙니다. 제대로 밥 먹을 시간과 잠 좀 자자는 생존권 차원에서의 요구입니다.”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방송사들은 노동시간을 지키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면서도 구체적인 방안을 내놓지 않고 있다. 하지만 20시간씩 3일, 16시간씩 4일 일하는 것이 드라마 스태프들이 마주한 현실이다. 스태프 김씨 사망을 두고 노조는 “과로사가 아니라고 하지만 서른의 젊은 나이에, 폭염에 죽을 것 같이 일하고 귀가 후 죽은 것처럼 지친 몸을 뉘였다가 세상을 등진 동료의 죽음이 남일 같지 않기에 더욱 가슴 아프다”고 했다.
추혜선 의원은 “노동자들의 요구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하루 8시간도 아니고 12시간만 일하고 12시간은 쉬게 해달라, 죽지 않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추 의원은 “지금까지 정부가 내놓은 대책들은 현장에서 전혀 힘을 갖지 못하는 조치들 뿐”이라며 정부, 방송사, 제작사가 근본적이고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할 것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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